사무엘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사울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사무엘하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던 사람,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떼를 치던 어린 소년이었을 때,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장). 그의 용모와 키는 왕으로서 합당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마음 중심은 하나님께 합당한 자였습니다(삼상 16:7). 어떤 면에서 다윗이 그런 자였는지는 이어지는 말씀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골리앗과의 싸움을 보면 그는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용사를 향해서 빠르게 달려 나갑니다(삼상 17:48). 일반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달랐을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월등히 뛰어났을까요? 다윗만이 하나님께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음을 알았을까요(삼상 17:47)?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다윗은 하나님의 군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는 것입니다(삼상 17:26, 36, 45). 다윗을 제외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옆집 아저씨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면, 다윗은 자기 아버지가 모욕 당하는 모습을 본 아들처럼 행동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정말로 중요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명예를 지켜야할 만큼 중요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윗의 생각과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무엘상에서 또 한번 다윗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계속해서 다른 전쟁도 승리로 이끌자 그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를 당시 왕인 사울은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지루한 도망자로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던 중 다윗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가 숨어있던 굴에 사울이 휴식을 취하러 들어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 하며 사울을 죽이라고 권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삼상 24:4, 10). 겁이 나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 24:6~7). 이와 비슷한 일이 한번 더 있었지만, 그 때도 다윗은 같은 이유로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삼상 26장).
다윗이 단지 왕의 자리를 원했다면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편안함이나 유익을 먼저 생각했어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혹,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나 상황을 먼저 생각했어도 사울을 죽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셨던 그의 중심(마음)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전쟁터에서 죽게 되고 다윗은 왕위에 오릅니다.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시작하여(삼하 2:4) 결국 온 이스라엘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고(5:1~5), 좀 더 가나안 땅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을 수도로 삼습니다(5:6~10). 예루살렘은 정치, 군사적 수도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장막 가운데 둡니다(6:1~19). 그리고 다윗의 왕국은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를 맞이합니다(7:1).
그러자 다윗의 마음 속에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7:2)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자신은 좋은 집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언약궤가 장막 가운데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고 싶어 합니다. 당시 선지자인 나단도 그 생각을 좋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린 다윗의 손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를 짓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집(왕조)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몇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첫번째 약속은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9절). 이에 대한 즉각적인 성취는 8장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8:6, 13~14).
두번째 약속은 쉼이 있는 장소입니다(10~11절).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해를 당하지 않고 쉼을 누리는 장소입니다. 다윗에게 평화를 주신 것(7:1)은 이 약속의 부분적인 혹은 일시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약속된 궁극적인 쉼과 쉴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약속은 궁극적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신다면, 이 처음 두 약속이 아브라함 언약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세번째로 집 혹은 왕조에 대한 약속입니다(11절). 하나님은 다윗의 왕조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16절). 여기에는 모세 언약에서처럼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입니다.
네번째 약속은 자손(씨)에 대한 것입니다(12절). 이 자손이 (다윗이 짓지 못한)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것입니다(13절).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하나님께 아들이 될 것입니다(14절). 다윗은 어쩌면 잘 생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칭송 받던 압살롬을 이 자손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14:25). 하지만 압살롬은 이 약속의 자손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왕상 8:19~20) 오히려 이 자손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성전을 지은 자가 바로 솔로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도 ‘영원한 나라’의 왕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땅에 영광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이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끝으로 나라(왕국)에 대한 약속입니다(13절). 솔로몬은 그의 왕국을 굳건하게 세웠습니다. 그의 왕국은 이스라엘 왕정 역사에 있어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부분적인 성취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나라는 다윗의 참 자손과 함께 올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역사입니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것처럼, 다윗 언약에는 어떤 조건도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그렇듯 영원한 언약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만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그에게는 더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삼하 7:18~29).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렇듯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마음을 좇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범죄 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윗은 정욕에 따라 행하여 간음과 살인이라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11장). 어떤 면에서는 사울보다 훨씬 더 큰 죄를 범한 것 같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그가 죄를 범했다고 지적했을 때 다윗이 뭐라고 말했는지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12:13)
어떤 다른 말도 없습니다. 사울처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도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분명히 인정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죄를 범한 것에 대해서 통회합니다. 시편 51편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록한 참회의 시입니다. 그 시를 가만히 읽어 보시면서 다윗이 무엇을 가장 염려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평판이 떨어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염려하고, 그것을 가장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비록 죄를 범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삶에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를 인정하고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한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무언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에 있어서 그분과 관련된 것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없이 그분과 관련된 무언가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그저 허울뿐인 종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리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기 보다, 하나님’을’ 알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분과 친밀한 관계에 거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무엇을 좇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목표점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향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주변의 것에 마음을 두고 좇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에 오직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따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약해서 넘어질 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돌아와 용서와 회복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 때 우리도 다윗과 같이 그 삶을 통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22:2~3)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22:32)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