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는 모세의 고별 설교입니다. 이 마지막 설교에서 모세가 강조하는 것은 그가 사용한 단어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를 500번 정도 언급했는데, 그중 279번 정도는 “너희의 하나님”, 23번 정도는 “우리 하나님”, 그리고 6번 정도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같은 표현과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가 언약의 이름이었는데, 모세는 거기에 더해서 그분이 바로 그들 조상의 하나님이셨고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더욱 강조해서 ‘너희’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의 핵심이었고 다른 메시지의 기초였습니다.
모세는 이 설교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혹은 그들을 위해 하신 일과 말씀을 회상합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가 아닌 ‘설교’이기 때문에 꼭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었는지에 주목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8; 6:10, 18; 8:1; 10:11; 11:9, 21; 19:8; 26:3; 28:11; 30:20; 31:7; 34:4). 신명기에서 ‘준다’는 동사는 과거형으로 완료형으로 그리고 미래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미 땅을 주셨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백성들과 싸워서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1:8; 2:31; 3:20; 6:18; 8:1; 9:4, 5, 23; 10:11; 11:8, 10, 11, 31; 16:20).
그 땅에 살던 백성들이 그들보다 장대했고,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그곳에서 아낙 자손들까지 살고 있었습니다(1:28).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들보다 강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1:32).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었고(1:30; 3:22; 20:4)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에게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수의 가족을 한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1:10).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번성하고 강하게 되었습니다(출 1:20). 그들을 강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지금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강함은 그 하나님을 믿는 데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반복해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5:15; 6:12; 7:18; 8:18; 16:3; 24:18).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들이 나보다 많으니(크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라고 그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7:17). 하지만 그들이 애굽인들을 향해 펼치신 그 강하신 팔을 기억한다면,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7:19).
또 하나,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인도와 보호하심 때문에 그분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앞의 두 사건은 사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과거의 일이었고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부모들을 통해 들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그들이 직접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그들을 안고 지금까지 인도하셨습니다(1:31).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그들을 징계하시며 바른길로 인도하셨습니다(8:5). 그 과정에서도 수많은 특별한 이적과 기적이 있었고 또한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도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는 지속적인 역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는 능력 많으신 아버지였습니다(7:8).
정복 전쟁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적도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그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독려한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못하고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후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는 부분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그 약속의 땅을 향해 평생을 살아왔지만 순간의 불순종 때문에 그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모세로서는 더욱더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십계명(5장), 예배자로서의 삶(12:1-16:17), 지도력(16:18-18:22), 사회 질서(19:1-23:14), 기타 규정(23:15-25:19),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의 첫 열매와 십일조(26:1-15)와 관련된 규례를 상기시키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말씀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왠지 딱딱하고 짐스러운 일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단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과 복종은 항상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며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개념에서 ‘사랑’과 ‘순종’은 때로 서로 바꿔쓸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개념을 포함합니다. 물론 사랑은 그 동기를, 순종은 그 행동을 더 강조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순종으로 증명되며, 순종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이고 순종은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길을 마치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최고의 지도자 모세가 전해주고 싶었던 마지막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이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그분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린 때로는 잊어버려서 때로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이 오래된 교훈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에 한 이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신 33:29)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다면, 영혼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한 자들입니까? 우리 하나님과 같은 분이 정말 어디에 있습니까? 그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안에서 놀라운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