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지상명령” 혹은 “대위임령”이라 불리는 말씀의 첫 소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모든 주의 제자들은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언제나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세례를 받지 못했고, 고넬료도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이 임하는 것으로 그들의 영적 상태가 확증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세례 받지 않고 믿을 수 있고 구원 얻을 수 있는데, 교회는 왜 세례를 요구하는가?”
아주 단순한 답이 여기에 있으니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스러운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 사랑의 주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으로도 답은 충분합니다.
세례를 주는 또다른 의미에 대해 마크 데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순종한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다. 그것은 최종적인 부활 및 주님과의 재회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적 소망뿐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영적 거듭남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요컨대 이 두 예식은 복음을 선언한다(마크 데버, “더 처치”, 73p).
더 나아가 데버는 패커와 한 목소리로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교회가 이 두 표지(성찬, 침례) 중 하나라도 무시하면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더 큰 가르침도 배제하게 되고, 사도적이며 보편적인 관행에서 분리되고 만다…세례나 성찬식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중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고백은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와 성찬식은 참된 교회의 지표다(74p)
세례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세례를 가리키는 단어인 밥티조(baptizo)가 일차적 의미로 “잠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례”의 의미를 가장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바로 침례(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침례 자체가 어떤 효력이나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침례는 영적으로 일어난 능력의 사건에 대한 공적인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 구원의 놀라운 능력을 세례에 순종하는 것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데버의 말처럼 세례는 우리에게 임한 복된 소식, 즉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며 보여줍니다. 침례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1. 침례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와 주인으로 영접한 자들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그분이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침례에 순종하여 물에 잠기는 것은 주와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습니다(벧전 2:24).
2. 침례는 우리가 주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6:4-5)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물에 잠겼다 나온 성도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것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는 이제 삶의 목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신 자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갈 3:27; 골 2:12).
3. 침례는 우리가 주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거합니다(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
성찬을 통해 모든 성도가 한 떡과 잔에 참여하여 한 분 그리스도와 연합한 공동체임을 증명하듯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과 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한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결의를 맺은 자들보다 더 끈끈한 수단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아버지 하나님을 둔 자녀들이 되었고(엡 4:6)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되었고(벧전 1:2)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으로(엡 4:3)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홀로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바로 하나된 새 생명들의 집합체에게 주어졌습니다.
4. 침례는 영생의 소망을 선포합니다(고전 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전 15:29)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확증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받는 것의 의미를 확장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은 신자는 이 땅에 살아갈 때에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육체와 영혼의 분리) 영원히 지속될 생명에 대한 소망도 포함한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썩지 않은 육체로 변화될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고전 15:50-58). 세례가 보여주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 허사입니다. 죽음도 우리 앞에서는 무기력합니다. 우리가 연합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으시기 때문입니다(히 13:8).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역은 창세 전부터 계획되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로 예언되어 왔으며 하나님의 언약으로 확증되어 왔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그 모든 계획을 성취하셨고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 아들과 연합 하는 것으로, 그 아들을 영접하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셔서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 마음에 그의 계명을 새기시며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날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과 연합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양자로 삼아주셔서 단단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침례는 바로 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복음이 우리의 침례를 통해 계속해서 선포 되기를 원하십니다.
침례는 교회의 가입을 위한 절차가 아닙니다. 학위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침례는 모든 성도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신에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는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것을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자신과 한 지체된 성도들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모르는 세상에게 하나님의 은헤와 사랑과 주권과 자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와서 이 사랑을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