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에서 사무엘로, 사무엘에서 사울로, 그리고 사울에서 다윗으로 지도력이 바뀌면서 이스라엘은 왕정 국가의 모습을 갖춰갑니다. 사무엘상은 사울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교훈 한 가지를 이 칼럼을 통해 나누길 원합니다.

잘 아시듯이, 사사기는 참으로 암울한 역사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물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사기의 역사는 마치 바닥을 모르고 내려가는 죄악의 소용돌이 같습니다.

사무엘상의 시작도 바로 그 사사 시대가 배경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상은 지도력의 문제를 강하게 지적합니다. 엘리라는 제사장 겸 사사가 있었지만, 그는 이미 분별력을 잃었고 그의 자녀들은 행실이 나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자기 욕심대로 먼저 가로채고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아들들의 잘못을 제사장 엘리는 지적하기는 했지만,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평가하십니다(삼상 2:29). 그리고 그와 그 집안에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언급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 2:30)

엘리는 동의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자신은 절대 하나님을 경멸하지 않았고 존중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저 자녀교육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 문제를 축소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그저 자녀교육에 실패한 것의 문제가 아니라, 엘리의 마음속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잘못된 우선순위가 증거하는 것은 엘리는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도리어 멸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심판을 그에게 내리시겠다고 선포하셨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하던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잘 이끌었습니다(삼상 7:3~4).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삼상 8:3).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사무엘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상상 8:4~5). 하지만 사무엘은 이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삼상 8:6). 왕정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왜 왕을 원했고 어떤 왕을 원했는지 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이 아닌 자신들의 왕(“우리 왕”)을 원했고 자신들의 앞에 서서 전쟁을 이끌어 줄 왕을 원했습니다(삼상 8:19~20). 한마디로 다른 ‘모든 나라와 같은’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 그들은 어떤 정치 체계를 가진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했는데, 그들이 지금 다른 왕을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삼상 8:7).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그래, 너희가 그런 왕을 원한다면 그런 왕을 너희에게 주마. 그에 대한 책임은 너희가 져라’고 말씀하시듯, 백성들이 원했던 것과 같은 왕인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가 왕으로 세움을 받고 처음 했던 일이 바로 백성들 앞에 서서 싸운 일이었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사울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삼상 11장). 하지만 이후의 사울에 대한 기록은 그가 왜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합당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이 정해진 시간에 빨리 오지 않고 백성들이 두려워 흩어지기 시작하자, 급한 마음에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제사장도 없이 번제를 드립니다(삼상 13:9; cf. 삼상 10:8).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이 자신에게서 흩어지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도착하자 사울은 ‘부득이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삼상 13:12).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좋게 보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울의 연약함은 백성들 앞에서 한 맹세를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삼상 14장). 하지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사울이 아말렉을 친 사건입니다(삼상 15장).

아말렉을 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사무엘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삼상 15:1)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3)

이 명령에 어떤 불확실함도 없었습니다.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사울이 할 일이었습니다. 이에 사울은 군대를 소집해서 아말렉을 칩니다. 성경은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진멸에 예외가 있었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8~9)

진멸했는데, 아말렉 왕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진멸했는데, 양과 소 중에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전부를 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사무엘은 근심하고 다음 날 일찍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위한 기념비까지 세웠고(삼상 14:12), 사무엘을 만나자 태연하게 인사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삼상 15:13)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말합니다. 기가 막힌 사무엘이 묻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삼상 15:14)

이에 대한 사울을 대답을 잘 보십시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5)

먼저 그것은 자신이 아닌 백성들이 주도적으로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불순종한 일에 대하여는 마치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일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순종한(?) 부분인 진멸에 대해서는 ‘우리’라고 말하며 자신을 끼워 넣습니다.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따지는 듯합니다.

사울의 이런 변명에 대해 사무엘은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히 지적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18~19)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진멸’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진멸’은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는 의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사울이 한 행동은 분명한 불순종이었고 그 의도가 뻔한 (좋은 것을 챙기려는 욕심) 악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명령에 있어 부분적인 순종은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에도 사울은 다시 한 번 같은 변명을 반복합니다. 자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했고, 단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분명히 못 박아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사울이 진심으로 회개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죄로 이끌었는지도 밝힙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 15:24)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이유는 그가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다만…”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지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지가 사울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순간에만 그런 면에서 넘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우선 순위가 그랬습니다. 사울의 왕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들의 평판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인정했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들의 시선, 자신의 평판이 더욱 중요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삼상 15:30)

죄지은 것은 죄지은 것이고, 일단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을 높여주고 평소처럼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사람을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후에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군대장으로 승리를 이끌어 백성들의 인기를 얻자 계속해서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고 한 것도 사울의 이런 연약함을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끝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방인의 손에 죽기보다 자살을 선택합니다.

사울 왕과 엘리 제사장의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저는 사울이 사용했던 ‘두려움’이란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여러 동기 중 ‘두려움’은 매우 강력한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와 사울이 궁극적으로 두려워했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일을 더 못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까?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두려워하여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경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혹은 무엇을 경외하고 계십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눅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