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의 시작은 암울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란 시간 배경은 단지 시간 배경뿐 아니라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중에 그 땅에 흉년(가뭄)이 들었습니다. 이런 흉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께서 내리실 심판 중 하나로 모세가 언급했던 것입니다(신 28:23-24). 그때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이 흉년을 피해서 가족과 함께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류합니다. 사사기에 이어 룻기를 읽는 사람이라면 뭔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사사기의 끝에 보면 어떤 사람이 베들레헴을 떠났을 때 끔찍한 일이 발생했었기 때문입니다(삿 17, 19장). 혹시 또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요? 혹시는 역시로 바뀝니다. 또다시 베들레헴을 떠난 자들의 비극이 그려집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사건 즉, 사사기 끝의 두 사건과 룻기를 ‘베들레헴 3부작(Bethlehem Trilog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을 떠난 엘리멜렉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병 때문인지 사고 때문인지 그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서 죽은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짧게 언급하고 곧장 시선을 그의 아내인 나오미에게로 옮깁니다. 여기까지는 안타깝기는 해도 ‘비극’이라고 하긴 좀 부족합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지만 두 아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말씀은 곧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라고 기록합니다. 이 모든 일이 10년 안에 발생한 일입니다. 부부와 두 아들로 구성되었던 가족이 세 명의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남자들이 모두 먼저 죽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나오미는 이 일에 대해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룻 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상황이 그 이름과 너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이란 뜻의 ‘마라’라고 자신을 불러 달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너무나 괴로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아마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도 막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는 이전의 두 베들레헴 이야기와 다르게 비극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1:6)는 말씀과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는 말씀은 뭔가 희망적인 일이 발생할 것을 암시합니다. 나오미 자신에게 닥친 괴로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나오미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진 계획의 끝이 아니라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며느리 두 명 중 오르바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룻만이 나오미와 함께 남습니다. 룻은 생계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바로 이삭을 줍는 일입니다(2:2). 이는 율법에 허용된 행위로 사회의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법입니다(레 19:9-10; 신 24:19). 그런데 룻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고(2:3)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2:4) 룻을 보고 그를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아마 룻의 상황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보아스는 룻이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온 것에 대해 “그[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왔다”(2:12)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룻은 그저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아스는 룻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보아스의 도움으로 룻은 보리를 많이 주워 집으로 돌아오고, 전후 사정을 들은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셨음을 압니다(2:20). 또 한 번, 나오미는 이런 우연 같은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임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에 나오미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합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현 상황에서 친족 구속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2:20-22; 3:1-4). 친족 구속자는 간단히 말해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당한 어려움(재산, 생명, 혹은 권리에서의 손해)에서 건져주는 가까운 친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서 땅을 팔면 값을 대신 치르고 재산을 유지할 수 있게 하거나(레 25:25), 빚 때문에 다른 사람의 종이 되면 빚을 갚아주어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레 25:47-55) 등을 했습니다. 자식이 없이 죽으면 과부와 결혼하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친족 구속자의 의무로 율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에 친족 구속자의 역할로 여겨졌습니다(신 25:5-10). 나오미는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자신과 (특별히) 룻의 구속자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룻에게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일러줍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하고 보아스는 자신의 역할에 충성하여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고 아들까지 낳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에 이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더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마치 에필로그처럼 기록된 룻기의 마지막 몇 구절은 룻기가 단지 한 여인의 성공 스토리거나 두 사람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오벳이었습니다. 룻기의 저자가 그 이름의 뜻(“섬기는 자”)보다 더 주목한 점은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다는 점입니다(4:17). 즉 오벳은 이스라엘이 나라로서 전성기를 누릴 수 있게 이끌었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 왕의 증조할아버지였습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속에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없어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대리자로 이 땅에 세울 왕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불순종(기근)과 과오(이방 아내를 취함)를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성격과 기질을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룻의 헌신과 충성스러움, 나오미의 지혜, 보아스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관대함이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 그들의 문화와 관습도 사용하셨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결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의 ‘친족 구속자’라는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당신의 왕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왕은 가깝게 봐서는 다윗이라는 인간 왕이지만 더 멀리 봐서는 그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이시기도 합니다. 룻기의 시작은 암울했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여전히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우린 때로 기적을 바랍니다. 왜 그럴까요? 놀라운 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그것보다는 당장에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지 않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그때는 아무 일도 하고 계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해달라고, 놀라운 일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나오미가 ‘마라’로 불리고 싶었을 때도 일하고 계셨었습니다. 룻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남의 밭에 나가서 일꾼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고 있을 때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죄가 가득 찬 때에 신실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던 보아스의 삶에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사실 섭리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귀찮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에 관여하시고 환경을 주관하십니다. 마치 악기를 부는 사람은 개개인이지만 지휘자가 그 사람들을 지휘해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삶을 통하여 자기 뜻을 이루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기적을 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적을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 속에서 기적적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