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칼럼과 마찬가지로 Colin Marshall과 Tony Payne이 쓴 <The Trellis and the Vine: The Ministry Mind-Shift that Changes Everything>라는 책 4과 “Is every Christian a vine-worker?”의 내용을 읽고 참고하여 쓴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말씀 사역자”라는 제목으로 성도가 함께 모일 때 말씀에 풍성히 거하여 서로 진리로 사랑을 말할 때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섬기는 말씀 사역자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말씀 드렸습니다. 권면할 때, 격려할 때, 상담하고 훈계할 때, 대답하고 말할 때, 우리 모두는 주가 피로 사신 형제, 자매의 영혼을 살려주고 세워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강단 설교 만큼이나 중요한 “말씀 사역”입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에 “진리”를 담아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말”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세우고 있는지 넘어뜨리고 있는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비단 목사나 전도자에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말씀 사역”보다는 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께서 주신 대위임령만 생각해봐도 우리 모두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의무가 부여된 주의 제자들입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방식이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의 제자가 된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제자화했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이자 사명 역시 동일하게 누군가를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제자화” 혹은 “제자로 삼는 것”의 첫 단추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 불순종의 자녀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 곧 하나님께서 온전히 이루시는 구원이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서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1) 베드로전서 3:15-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그들이 속한 각처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되, 여러 핍박 중에서도 그렇게 살게 하는 힘, 곧 그들이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명합니다. 그 전에 베드로가 제시한 여러 가지 사회 계층(정치 지도자-시민, 주인-종, 남편-아내)을 고려할 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할 대상이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속한 여러 사회 관계 속에서 복음은 언제든지 선포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2) 데살로니가전서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통해 갓 구원을 받은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얼마나 강력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바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뿐만 아니라 각처로 그들의 변화된 삶의 증거들이 전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전도지를 돌린다거나 정확한 복음 교리를 설명해주거나 교회로 인도하는 것 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도 그들이 각처에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이, 그 변화된 삶이 그들의 강력한 복음 선포가 되었습니다.
3)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교회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기 보다는 바울 자신과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한 마디로 이기적인 태도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헌신적으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참 특별합니다.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간증이 각처에 퍼진 것처럼 우리가 속한 사회 각 처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강력한 복음 전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거나 복음 교리를 전하는 것에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그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 대답을 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썩지 아니할 씨인 복음의 말씀을 그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그분의 충만하심에 따라 강력한 능력을 갖춘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랬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한 삶이 그와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준 구체적인 명령들(정치 지도자들에게 순종할 것, 주인에게 충성할 것, 남편을 존경할 것)은 단순히 사회에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잘 살라고 준 명령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들을 빛으로 불러내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즉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그들이 주의 제자인줄 알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35). 성도가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 자체가 강력한 복음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신과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수많은 제자들을 더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게 뒤틀리고 거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거룩한 삶에서 멀어졌기 때문이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복음 교리를 거침없이 강력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 전파된 진리를 배신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힘 입어 복음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전에 중고차를 사러 갔다가 그곳에서 일하시는 한 형제님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것이 참 부럽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형제님, 사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최전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로 배정된 곳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형제님이 저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리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루에서 수없이 많은 잃어버린 영혼을 만나고 그들에게 삶의 간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최전방에서 일하고 계신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격려하고 기도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형제님의 삶이 더 부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 전도자입니다. 말을 통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우리가 그런 삶을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는 전도자입니다. 각자 처한 곳에서 우리는 복음의 삶을 사는 선교사입니다. 온유함과 사랑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충성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으로 내 유익을 구하는 세상에서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뜨겁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사랑의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 전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