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1-11절 말씀을 통하여 말세의 ‘고통하는 때’를 겪고 있는 교회가 당하는 어려움인 외로움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돈과 쾌락과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의 풍조 속에 교회는 극심한 외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본문 자체가 외로움 극복을 위한 레시피를 제공하려는 말씀은 아니지만, 죄와 치열한 싸움을 싸우지 않거나(1-6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지 않거나(7절), 뜨겁게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8절) 교회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교회로 변질되기 쉽상입니다. 이러한 변질이 빚어내는 고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로움입니다.

사랑 공동체로서 뜨겁게 불타올라야 할 교회가 외로움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시대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의 갑옷을 무장해제했다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과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듭났을 때 우리 안에 시작하신 거짓없는 형제 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하신 우리 주님의 명령에 우리는 언제나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번 칼럼에 우리는 뜨거운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편인 “대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도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 적용되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몸된 교회로서 함께 모였을 때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문(10-11절)은 “서로 봉사하라”고 명령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시리즈 마지막으로 살펴볼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내용입니다.

교회는 섬기기 위한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주와 선생되신 예수께서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이 교훈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베드로는 마땅한 바 “서로 봉사하라” “서로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교회의 각 지체는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몸의 각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서로를 돕듯 교회의 각 지체들은 유기적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로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서로를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은사”라고 말합니다(10절).

“은사”(카리스마)는 “은혜”와 어원이 같은데 ‘선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거듭난 자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뜻대로(고전 12:11) 주시는 특별한 영적 재능이나 자원을 말합니다(롬 12:6-8; 고전 12:7-11, 28-30). 바울은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다고 말합니다(고전 7:7).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엔 바울이 언급한 여러가지 신비로운 은사들(믿음, 병고침, 방언,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등)이 있었지만 오늘날엔 봉사와 섬김, 가르치는 것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한 일꾼들(교사, 전도자, 목사, 교사)을 세우시기도 합니다.

바울은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은사”를 사용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은혜”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건강과 시간, 물질과 영향력, 지성과 재능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다채로운 색깔로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처럼 하나님은 각각의 성도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다양하게 주시고 그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은사”를 우리가 취득했거나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현재 누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시간과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기회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없이 내려지지 않았을 재능들, 인간관계들, 건강, 자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으스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은사의 탁월함으로 서로 자랑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오히려 “은사”는 그것의 공급자이자 주인되신 분의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당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주인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으로 종들에게 양식을 분배하여 나눠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42절). 주인은 충성된 종을 간절히 찾습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종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사를 맡겨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지혜롭고 진실하게 사용해야 하는 청지기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 나게 맡겨진 은사에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은 각자에게 합당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 받은 자를 보며 불평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땅에 묻어버리면 안 됩니다. 주인은 종에게 어느정도를 줄 것인지 결정할 권한도 있고 그 대가를 찾을 권한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만족해야 합니다.

2.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는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혹은 간절히 구해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뜻대로 주어진 것으로 성도를 섬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 우월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실 것입니다. 받은 은혜로 겸손히 섬기는 것이 종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3.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섬깁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가르침이 “만물의 마지막 때”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주인의 결산의 시기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은사를 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어떻게 성도를 섬겼는지 계산할 때가 올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은 자입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청지기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베드로는 이제 맡겨진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모든 은사가 활용되는 영역을 두 가지 범주로 묶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말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말로 서로를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설교, 가르침, 복음전파 등이 있을 것입니다. 상담, 위로, 격려, 교제, 또는 찬양과 감사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명합니다. 그만큼 진중한 태도로 그리고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을 가지고 격려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사상을 가지고 서로를 위로하고 권면할 수 없습니다. 가령 시어머니와 갈등을 겪는 자매에게 ‘남편에게 화풀이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혹은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에게 ‘일단 돈을 많이 벌어두는 것이 장래를 위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펴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허풍과 입에 발린 말로 영혼을 꼬시려고 하는 것도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의 교훈을 거스르는 내용을 담은 가사로 찬양을 부르는 것도 성도에게 큰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말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항상 진리 안에서 해야합니다. 우리 입에서 나가는 말들이 진리와 한 목소리를 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영역은 “봉사”인데, 말로 섬기는 영역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명합니다. 이 말은 몇 가지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먼저,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의 힘으로만 봉사한다고 여길 때 빠질 수 있는 교만의 문제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다한 것처럼, 자기가 이루어냈고 다른 사람은 별로 도와준 것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않거나 함께 봉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봉사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다 한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은 금새 지칩니다. 자신의 힘이 다 떨어지거나 의욕이 사라지면 더 이상 봉사할 이유도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에 의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말”이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내야 했던 것처럼, “봉사”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담아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신실하고 지혜롭게 우리는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각자 받은 은사로 교회의 각 성도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충성을 다해 서로를 섬긴다면 교회는 금새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외로움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서로 섬기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11절)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주제로 본문을 접근하였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외로움은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이 토로하는 문제입니다. 성도의 섬김과 사랑을 받는 자들은 외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으로 외로움을 겪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성도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각각 서로 대접하고, 서로 봉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고립되고 외로운 자리에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말,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셨습니다. 그의 흠없는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 소유된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범사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권능이 우리를 살리셨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은사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분의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고 산소망을 하늘에 붙들어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 날까지 지켜 내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제 그만 외로움의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당신은 자기 자신 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썩어질 것들인 사람들의 인정, 관심에서 찾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영광이 무궁하도록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그것으로 채워지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붙드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어떻게 불러내셔서 어떤 것들을 주시기 원하시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사랑 공동체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자신을 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그분의 뜻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곧 우리 주인이 돌아오십니다. 청지기와 같이 맡겨진 은혜를 가지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니 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세세 무궁토록 있는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사랑 공동체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