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사랑을 지켜내라)고 명령한 뒤 “서로 대접하라”고 한 베드로의 문장구조는 참 흥미롭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방식이 “대접”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실천 가운데 베드로가 처음으로 꼽은 것이 “대접”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이 짧은 성경 말씀,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는 우리에게 놀랍고 강력한 사랑의 실천을 촉구합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사회적인 미덕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출 22:21).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창 18:1-2).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애굽에서 객과 나그네로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나그네와 손님들을 대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신 14:29).

신약시대로 넘어와 초대교회는 기본적인 사회 미덕으로서의 대접 보다 더 절실한 필요에 의해 서로 “대접”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면서 그들이 한 곳에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없었고 성전 아니면 각각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행 2:42). 당연히 누군가의 집이 개방되야 하고 섬김과 봉사가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도 기본적으로 집이라는 장소에서 모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16:3-5, 23; 고전 16:19; 골 4:15; 몬 2).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을 방문할때나 어떤 성도가 핍박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피신할 때, 그들은 머물 곳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숙박시설은 오늘날 보다 더 이교도적이고 낙후되어 있어 성도로서 있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의 집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이 전도했던 곳인 빌립보에서 첫 회심자였던 루디아입니다. 그녀는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행 16:15)고 하면서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섬겼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가이오에게 편지하면서 그가 나그네 된 자들 곧 형제들을 신실하게 섬겼던 점을 칭찬합니다(요삼 1:5). 

예수님은 이렇게 서로 대접하며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마 10:11)

그 합당한 자가 서로 되기 위해 힘쓰라는 것이 베드로의 명령이며,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 하기를 힘쓰라(롬 12:13)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또한 교회의 일꾼들의 자격조건에도 이 사랑의 실천인 “대접”이 포함되었습니다(딤전 3:2; 딛 1:8).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베드로가 “원망 없이 하라”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원망”의 어원은 ‘남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으로 쉽게 말해 불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님 대접을 하면서 동시에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해본 사람은 어느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억지로 초대한 경우 더욱 더 그럴 것이고, 다양한 이유로 손님 때문에 불편함을 경험하면서 입 밖으로 불만이 표출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에 ‘손님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입에서 불평이 흘러나오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9절의 말씀이 시작된 지점인 7절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의 원망을 부추기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세의 강력한 특징, 말세에 사람들이 사랑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는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입니다. 손님 대접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를 요구하는데 이는 시간과 비용과 헌신(이타적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시간과 비용과 이타적 마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 “대접”을 받기는 더욱 더 힘들어졌습니다. 말세의 풍조와 그것을 사랑하는 우리의 육신이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을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한국에서 손님이 오시면 안방을 내어드리는 것이 사회적 미덕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초대하지 않는 것이 미덕입니다. 가능하면 밖에서 식사나 한 번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각자 적당한 시간과 비용을 함께 투자하되 집으로 초대하여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간에 되도록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반대로 명령합니다. “서로 대접하라.”

현대 교회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교회가 외로움을 느낍니까? 서로 각자 개별적인 신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공동체로서 서로의 삶을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공간에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함께 나누면서도 개인적인 삶을 나누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는 서로를 섬기는데 헌신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비용과 헌신의 마음을 쏟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교회에서 헌신적인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개개인의 성도가 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한다면 사랑의 실천으로서 서로 대접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물론 교회가 함께 모일 때 은사에 따라 서로를 섬기는 여러 가지 모습도 사랑의 실천이며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0-11절에 그것을 다루고 있으며 다음 칼럼에서 그것을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그보다 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명령인 “대접”을 다루고 있습니다. “뜨거운 성도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접”을 장로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로들은 그 점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의 필요가 있을 때, 돌아보고 격려하며 권면하고 세워줄 필요가 보일 때 성도를 대접하여 그 사람의 삶을 돌봐야 하는 책임은 오직 장로들에게만 있을까요? 교회에 새로운 가족이 더해졌는데 그를 대접해야 할 책임은 오직 일꾼들에게만 있을까요? 만일 교회에서 20명이 더해진다면(초대교회는 삼천명이 한꺼번에 더해졌습니다), 장로 혹은 장로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대접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요? 베드로의 명령에 기록된 “서로”는 이점을 명쾌하게 만들어줍니다. “대접”의 명령은 “서로”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명령하신다면 주의 군사들은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군대 명령체계에서 “싫습니다”는 없습니다. 오직 “예”만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예”가 되셨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리해야 합니다(고후 1:20-22)

또한 그것이 우리의 성도를 향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새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우리가 주의 제자인줄 알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셨지만 제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그 제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습니다. 성도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선포하는 채널은 성도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대접”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보상해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신 14:29)고 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주님은 또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신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도를 대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대접합니다. 우리가 성도를 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을 섬깁니다. 그분이 “잘하였다!”고 하시며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리겠다고 고백했던 예수님이 아닙니까?

성도를 대접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 시작했으니 계속된 형제 사랑의 힘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영원한 목마름을 채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정도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풍성히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받아주심으로 우리의 기쁨을 완성시키십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섬길 때 우리에게 오히려 커다란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2008년 미국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처음 방문한 날, 저는 300여명이 모인 소그룹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처음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마치고 두 사람이 저를 찾아오더니 저를 오후에 식사초대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와서 잘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 적응할 준비를 하던 저에게는 참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고 문화도 달랐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습니다(저는 처음 방문한 사람이니까요). 얼마나 멀리 사는지, 만일 제가 차가 없다면 어디까지 태워줘야 하는지, 어떤 음식을 얼마나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 시간은 그들이 힘들게 일하고 잠시 쉴 수 있는 꿀같은 휴식시간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보다 저에 대한 사랑이 컸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런 교회는 외로움에 잠식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넘치는 사랑이 외로움이 자리잡을 공간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