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6-7)
01: 반전이 있는 이야기
사람들은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별히 우울하고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가 어떤 계기로 극적으로 전환되어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을 때 일종의 희열감을 느끼기도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는 홍해 앞까지 바로의 군대가 들이닥치고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가로막을 때 기가 막힌 반전 이야기가 시작된다. 요셉의 이야기도 형들에게 팔리고 감옥에 갇히면서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때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진다. 이사야 8장은 확실히 어두운 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8장 20~22절).
색으로 말하면 굉장히 어두운색이다. 흑암. 육신의 통증으로 묘사하면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냥 고통도 아니고 고통의 흑암이다. 개선될 여지가 없고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은 무언가를 위한 진통이 아니라 그냥 고통이다. 삶은 곤고하다. 소망을 가질 것이 없는 허망한 삶이다. 육체적으로는 굶주려서 격분한다. 왕과 하나님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땅은 환난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앗수르라는 제국으로 심판하시려 한다(8:7).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그분의 뜻으로 돌이키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 어두운 이야기도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고 책망하면서 그것을 거절할 경우 당할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8:20).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국 그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선지자 이사야가 묘사한 것과 같은 참혹한 고통을 맛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왕하 15:29).
제국의 침입, 포로로 끌려감, 다른 민족과 억지로 섞이고 파멸을 맞이하며 억압받고 고통받는 식민지의 삶을 살게 된다. 절대로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목이 베이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관계가 끊어지며 두려움에 휩싸여 살게 되는 진짜 고통의 흑암이다. 흑암이 깊어질수록 이 이야기를 뒤집을 수 있는 반전에 대한 소망도 사라진다.
그런데 이사야 9장 1절에서 갑자기 직전에 한 이야기를 뒤집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갑자기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난 것인가? 조금 전까지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라고 선포하고 나서 곧바로 “흑암이 없으리로다”라니…이런 반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왜? 누가 이런 반전을 일으키는 것인가?
1절에 나오는 힌트는 바로 “여호와”이시다. 그분이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가장 먼저 선점한 곳으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던 지역이다. 앗수르의 멸시를 받아 이용되던 해변 길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축출된 요단 저쪽의 땅 갈릴리를 여호와께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방의 땅” 갈릴리는 참 독특한 표현이다. 여호와께서는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돌려주는 것 그 이상으로 회복시킬 계획이다. 그분의 반전 이야기에는 흑암 속에 있던 자기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여기서 반전을 멈추지 않으신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에게 큰 빛을 보게 하신다(2절).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을 비추신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시키신다. 또한, 여호와는 나라를 창성하게 하신다. 더이상 곤고하고 원망 가득한 나라가 아니다. 배고픈 나라, 궁핍한 나라였는데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 가득한 나라가 되었다. 누가 그렇게 하시는가? 주께서 하신다(3절).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한다.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 그들이 휘두르던 막대기, 어깨에 내리친 채찍, 무겁게 짊어지게 한 멍에를 여호와께서 파하신다.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여 입에 풀칠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몇몇 사람을 통해 스불론과 납달리를 억압하던 미디안을 파괴하신 날을 기억하는가?(삿 6:35). 그런 일을 여호와께서 하실 것이다(4절).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 전투화와 피 묻은 전투복을 다 태워버린다. 이제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땅의 환난이 끝이 났다(사 2:2~4). 선지자 이사야는 과거형 동사를 사용하면서 미래의 소망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실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도 신적 열심으로 반드시 이 반전을 이루어 내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7절)
어떻게 여호와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인가? 무엇을 통해 이 놀라운 반전을 이루실 것인가? 흑암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이방인들에게 여호와께서 어떻게 빛을 비춰주실 것인가?
옛적 다윗왕이 있을 때 그런 나라가 세워지는가 싶었지만 온전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솔로몬이 반짝 강력한 국가를 세웠지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국가는 점점 기울어지고 끝없는 고통의 흑암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떤 왕이 이스라엘에 세워져 모든 절망과 고통의 이야기를 즐거움과 평안의 이야기로 반전시킬 것인가? 이 일을 해내려면 얼마나 강력하고 도덕적이며 영적으로 충만한 왕이 세워져야 할까?
우리는 주전 733년경에 쓰인 이 놀라운 말씀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우리에게 난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신 “한 아들.” 이 사내 아기가 반전 이야기의 축이다. 이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다는 사실은 온통 흑암으로 가득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비치게 하고 모든 전쟁과 억압과 멍에와 채찍, 고통에서 해방을 가져온다.
거대 제국 앗수르, 온통 타락으로 곪아 터진 이스라엘 지도자, 영적으로 썩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 국가들…이 모든 총체적 난국에서 완벽한 반전을 이루어내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이 “한 아기”라는 말인가?
이 아기는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아기이길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놀라운 반전의 이야기를 갖게 하는 것인가? 어떤 아기이길래 그 영광과 즐거움의 빛이 이방인까지 비치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반전의 핵심 인물,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한 아기”, “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주목하려 한다. 그분은 단지 우리를 위해 제단에 바쳐질 희생제물로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이사야 시대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 시대의 흑암과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고 사랑과 자비 같은 영적인 교훈만 강조한 위대한 랍비도 아니다. 외부환경을 초월하여 기도와 수행을 통해 내적 평안과 해탈의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인도자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어그러진 세상과 망가진 도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대항했던 지도자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아니면서도 인류 역사 속 모든 사람의 인생에 완벽한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두 삶의 반전을 기대한다. 세상과 역사를 보면서 반전이 없다면 지독하게 허무하고 아무 의미 없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발견한다. 전쟁과 핍박, 사고와 죄악…그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간 불쌍한 인생, 그것이 전부라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인생의 반전을 바란다. 수고와 슬픔만 남는 이 땅 위에서의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이 확연한 악과 부패한 세상이 현실이란 말인가? 개인이 속한 작은 삶의 영역 속에서 사랑, 가족, 우정, 성취를 맛보며 인생은 그래도 의미 있다고 말해보지만 세상에 관영한 불의와 거짓과 속임과 살인과 저주와 악독을 없는 것처럼 무시할 수 없다.
속속들이 타락한 세상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여러 이상가들이 꿈꾸고 철학가들이 제시하며 운동가들이 주장했던 이상적인 세상, 그 세상을 일으킬 왕이 필요하다. 모든 죄를 파하고, 죄악 된 세상을 무너뜨리며, 평강과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온전히 다스릴 왕. 더 이상의 눈물과 고통은 없고 흑암도 걷히며 찬란한 빛으로 온전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영원히 누리도록 백성들을 다스릴 왕. 그 왕에 대해 이사야는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사야의 설명을 천천히 읽고 읊조려보자.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그 이름을 사랑하고 그 놀라운 이름이 가진 능력과 지혜와 힘이 우리 삶에 진정한 반전을 가져오기를 기도하자.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한 아기, 한 아들, 정사를 멘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그가 군림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 역사를 반전시키시는지, 우리의 삶을 뒤바꿔 놓으시는지 힘써 알고 기뻐하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사야967
02. 한 아기
03. 한 아들
04. 정사를 멘 어깨
05. 기묘자, 모사
06. 전능하신 하나님
07. 영존하시는 아버지
08. 평강의 왕
09. 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