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04. 그 어깨에 정사를 멘 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한 아기,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묘사는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이다.

“정사”가 무엇인가? 히브리어 원어로 미스라인 이 단어는 영어로 dominion, rule, domination 등의 뜻을 가진다. 우리말로는 “지배권”, “원칙”, “통치”로 번역될 수 있다. 7절에 “정사”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것이 구약에서 미스라가 사용된 모든 경우다.

알렉 모티어는 자신이 쓴 주석(The Prophecy of Isaiah, IVP, 1996)에서 미스라는 히브리어 사르와 연결된 단어로 “왕자” 혹은 “경영자”의 뜻을 가진다고 설명한다(102p).

주전 4세기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는 헬라어 아르케가 이 단어를 대체했는데 “처음”(히 2:3; 3:14; 벧후 3:4; 요일 2:24) 혹은 “권세자”(롬 8:38; 엡 3:10), “통치”(고전 15:24; 엡 1:21), “통치자”(엡 6:12; 골 1:16; 2:10, 15; 딛 3:1) 등으로 번역되었다.

특별히 “어깨에 메다”는 표현은 가지고 있는 “주권”, “지배권”, “통치권”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22장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이 직접 선출하신 이스라엘 통치력의 상징적 인물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셨다(사 55:3-5).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열쇠, 그것이 “그”의 어깨에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가 곧 결정자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신 “한 아들”은 다윗에게 약속된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왕이며 그 나라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실 것이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 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계 1:18).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신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이사야의 예언적 표현 그대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실 것이라 예언하였다(사 9:4). 그리고 모티어의 말대로 흥미롭게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이, 예수께서 그 어깨에 정사를 메는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다. 선하고 공의로운 왕의 통치가 그들에게 쉼을 가져다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떠오르지 않는가?

수고하고 무거은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는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온유하고 겸손하신 왕이 다스리신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멍에는 악하고 이기적인 세상이 요구하는 것보다 쉽고 가볍다. 그 왕의 통치 아래 있으면 진정한 쉼을 얻는다.

바울은 본래 우리가 섬겼던 왕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말한다(엡 2:2). 그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그가 지배하는 세상의 풍조를 배우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인생, 그것이 죄와 허물로 죽은 삶이다. 본질적으로 진노의 백성으로 사는 삶이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엡 2:4-5).

하나님은 이 일을 전에 예비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의 “처음”, 어깨에 “정사”를 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지으심을 받았다(엡 2:10; 딛 2:14).

마귀의 온갖 비방과 참소의 채찍, 거짓과 속임의 막대기로 백성을 억압하고 때리고 파멸시키는 압제자, 그를 꺾으신 분은 바로 어깨에 정사를 멘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간 백성은 이제 쉼을 얻는다.

세상에서 환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 환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다. 그분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보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3)

그분이다! 어깨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지셔서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권세가 있는 분,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정사를 어깨에 멘 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보내신 자, 한 아기, 한 아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참 평안이 있다. 환난을 당해도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 그래서 마음에 근심도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는 평안(요 14:27). 그가 세상을 이기셨고 그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목이 베여도 영원한 그 나라에서는 영생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왕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 시작된 나라, 그리고 장차 이 땅에 온전히 가시적으로 임할 영원한 그의 나라. 그 나라 백성은 그래서 그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한 아기가 이 땅에 났을 때 천사는 외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1. 왕의 멍에를 멜 것인가?

다시 말해, 이 왕의 통치 아래 들어가겠는가? 이 왕을 영접하겠는가?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셨다. 이 왕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있지만 거절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당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속하는가? 이 왕을 기뻐하며 영접하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이다. 겸손과 온유로 옷 입은 이 왕의 통치 아래 굴복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복이 있다.

지금은 이 왕을 거절하는 객기를 부릴 수 있다. 객기라는 말이 적절하다. “혈기에서 함부로 부리는 용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욕구대로 함부로 용기 내 이 왕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렇게 경고한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라…

바울이 에베소서에 편지한 내용 중 마귀의 백성, 불순종의 자식의 삶의 묘사와 아주 흡사하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사는 삶. 다음의 경고를 주목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그의 나라는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또 다른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예수께서 침례 받으실 때 들렸던 음성),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준 자(예수께서 침례 받으실 때 위에 임하신 성령), 그분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실 것이다. 육지에서 떨어진 모든 섬들도 그 교훈을 앙망할 것이다(사 42). 그 어깨에 멘 통치가 미치지 못할 곳은 하늘과 땅, 바다 깊은 곳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왕을 거절한 자여 어디로 피할 것인가?

2. 왕을 선포할 것인가?

예수님은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렇다. 그 어깨에 모든 정사를 메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이것이 왕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왕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 메시지를 선포할 대상이다. 왕을 보내신 아버지, 그 왕에게 능력을 더하신 성령님과 함께 왕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푼다. 그것으로 그 사람은 공식적으로 왕의 통치 아래 들어온 백성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가능하게 된 일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는 왕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먼저 제자 된 이들, 그 왕의 백성이 된 자들은 새로 백성이 된 자들을 가르쳐 그 법을 지키게 할 책임이 있다. 이 막중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또한 “열쇠”라는 말을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분의 권세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의 어깨에 있던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여닫는 권세, 그 권세가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신다.

우리는 사실 이 땅에서 놀랍고 위대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영혼을 인도하여 왕에게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일을 귀찮고 하찮은 일로 치부하지 말라. 왕의 명령이다. 순종하라!

그의 통치를 사모하라.

온유하고 겸손히 내 삶을 다스리는 왕의 인품과 자비를 찬양하라. 어떤 왕이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린단 말인가?

만민을 친히 다스리는 왕의 신성과 능력을 경배하라.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고 붙들고 다스리는 권세가 그분께 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늘에서 품으신 왕의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질 날을 기대하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으로 왕의 뜻을 이루라.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왕, 어깨에 정사를 멘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긍휼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벧전 2:9-10).

어깨에 정사를 멘 왕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왕으로 인해 우리는 마귀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당신은 이 왕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천 년 전 사람들처럼 십자가에 당신의 왕을 못 박을 수 있다. 거절하고 마음으로 죽이고 부인하며 당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하지만 솔로몬의 경고를 기억하라!)

혹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왕을 따르는 것이다. 후자를 선택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어깨에 정사를 멘 그분의 통치 아래서 영원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