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평강”은 히브리어로 우리에게 익숙한 샬롬이다. 구약성경에만 무려 209번이 사용될 정도로 평강 혹은 평안은 성경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당신은 언제 평강을 느끼는가?
인터넷 검색엔진에 “평안”을 검색해보면 여러 이미지가 나온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동산, 잔잔한 바다, 평온한 바다를 비추는 태양, 해변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 양을 치는 목자, 기도하는 손… 이 이미지들은 사람이 각자 갈망하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공통점은 누구나 평온하고 자유로운 심적 안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일상의 염려에 흔들리고, 세상의 유혹에 쉽게 요동친다. 사람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가 불안을 조장한다. 말 한마디에도 쉽게 평정심을 잃어버릴 수 있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앞날에 대해 염려를 한다. 때로는 자식이나 부모, 친구의 문제 때문에 평안을 쉽게 잃어버린다. 한 마디로 사람은 너무 쉽게, 너무 자주 평안을 잃어버린다. 평안함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고 느끼는 찰나에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만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심신의 수양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는 불안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을 훈련하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절대적 평안을 내적으로 갖추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불교에서는 모든 불안과 염려로부터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평안을 얻어야 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자기 힘으로 평안을 지켜내야 한다. 결국 불교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얻는 방법은 스스로 절대적인 능력을 갖춰 심신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사람은 절대자가 될 수 있는가?
잠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정직하게 자신을 점검해 보라. 외부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가? 경제적 위기를 늦출 수 있는가?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 이렇게 거시적인 일은 둘째치고, 눈앞의 생활을 개선할 능력은 있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내 마음만큼은 그 어떤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낼 힘이 있는가?
불가능하다. 사람은 외부 환경도, 내적인 상태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지금이라도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나마 있던 평안함조차 언제 어떤 일로든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 사람의 능력에 기댄 평안은 안개와 같이 허황되고 일시적이다.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안을 줄 수 있는 절대적인 대상을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나님이 바로 그 절대적 대상이다. 사람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외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하는 전능하신 분이다(시 50:1; 147:5; 마 10:30; 요일 3:20). 또한 그분은 빌립보서 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다. 사람의 염려와 불안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기 마련인데,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다.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욥 37:16). 모든 것을 아신다(요일 3:20). 온 천하에 일어나는 일을 다 아시고(욥 28:24), 어떤 일이 시작할 때 그 일의 마지막을 보시는 분이다(사 46:9-10). 이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에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 그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라는 것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실 때,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하였는데, 예수님의 나심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외쳤다(눅 2:14).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세상이 약속한 평안은 쉽게 사라지는 평안이다. 환난을 당하면 거꾸러질 평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환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다. 세상보다 큰 하나님, 세상을 이긴 그분이 주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평강을 주시는 절대적인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먼 데에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6-17)
가까운데 있는 자들(유대인)과 먼 데 있는 자들(이방인)에게 평안의 소식을 전한 분은 같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기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 그들이 비교적 하나님과 가까운 데 있었든지, 멀리 있었든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을 받는 특권을 누렸든지, 상대적으로 덜 알고 있어서 외부인으로 취급되었든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그가 기뻐하신 자들에게 주어진다. 막혔던 관계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영원히 맺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수로서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셨다.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누렸던 모든 친밀함과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받게 되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온다.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아버지가 억만장자라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줄 만큼 자식을 사랑한다면, 생활의 염려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아버지가 뛰어난 의술을 갖춘 최고의 병원 원장이라면, 과장해서 말하자면 죽은 자도 살릴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식을 눈동자처럼 보고 있고 머리칼을 셀 정도로 돌보고 있다면,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 아버지가 현자라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지혜롭게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현명하게 찾아내는 사람이라면,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계획한 대로 이루어낼 수 있다면, 그 자녀는 앞날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
평안할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일, 염려되는 일을 만날 때 동요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누군지 기억할 때, 그의 마음과 생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함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허락된 평안이 바로 그러한 평안이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그가 택하신 방법을 생각해 보자.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하늘 보좌와 비교하여 너무나 불편한 구유에 태어나셨다. 부유한 가정에서 평안한 삶을 살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이름 없이 불편한 삶을 사셨다. 인기를 얻고 대우를 받아 편안하게 사역하기보다는 수많은 배척과 거절을 당하면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역하셨다. 평화의 왕으로 보좌에 앉아 높임을 받기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찔리고, 상하고, 매 맞고, 피 흘리고, 결국 죽임을 당하셨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 평안한 환경을 찾거나 평안한 방법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근심과 염려가 가득할 수 있는 환경과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위해, 세상이 이길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분이 고난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평안에 감사하자. 예수님의 탄생, 희생적인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셨다.
형제자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기도하자(엡 6:2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켜지기를 간구하자.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염려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분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지 않으셨는가? 그분이 만물보다 크시고 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자. 오직 그분을 믿고 구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지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