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03. 한 아들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에는 언제나 감동과 눈물이 있다. 특별히 그 희생이 목숨과 연관된 경우 더 그렇다. 아버지가 자녀를 살리기 위해 대신 자기를 희생한 일, 자녀가 부모를 위해 생명에 지장을 줄지도 모르지만, 장기를 이식해주는 일, 국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 친척, 친구, 이웃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진 의로운 위인들…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지만, 종종 일어나는 놀라운 희생과 사랑의 이야기는 듣는이를 멈추게 하고 뭉클하게 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하게 한다. 특히 그 수혜자가 자기 자신이라면 그 희생에 대한 감사는 평생을 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간해서는 듣지 못하는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인류의 역사를 반전시키는 위대한 왕으로 오신 그분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당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당신이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기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귀한 자녀를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사랑은 얼마나 희생적인 것인가?

여러 아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 아들”은 하나님에게 있는 “독생자”였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뿐인 아들을 멸망 가운데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그 희생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지 말해준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우리는 여기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세 가지 측면으로 묵상해볼 수 있다.

1. 죄인을 위한 희생

바울은 희생적인 사랑이 드물다는 사실을 말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 간혹 일어나는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라고 표현했고 10절에서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고 말한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경건을 이룰 수 없는 때였고,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원수로 있었던 때였다. 결국 “죄인 되었을 때”라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적으로 타락한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와 상관없는 죄를 범한 사람의 죄책을 담당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대항하는 원수 같은 죄인의 죄책을 담당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이 사실을 천천히 묵상해보자. 우리는 사소한 잘못을 범한 이에게 얼마나 관대하지 못한가? 내 순서를 가로챈 이에게 양보하는 것, 나에게 정신적인 관계적인 상처를 준 이를 위해 호의를 베푸는 것, 그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만일 누군가의 죄로 인해 나와 내 부모의 친밀한 관계에 단절이 왔다면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겠는가? 원수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 중 가장 받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누가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내 오른편 뺨을 치고 법정소송을 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속옷까지 빼앗으려고 하고 억지로 나를 오 리를 가게 만들면서 자신이 필요할 때는 구하고 꾸려고 한다면 이런 자에게 어떻게 호의를 베풀 수 있겠는가? 이런 자에게 생명을 내어주라고?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원수인 죄인을 위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를 완벽하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한 아들”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희생이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원수를 바라보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치신다(눅 23:34).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독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약하고 어리석은 죄인을 위해 한 아들을 주셨다. 사실 이 놀라운 희생은 아들을 죽인 원수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원수인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뺨을 치던 군사들이 기억나는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맞으셨다. 예수의 속옷을 제비뽑고 겉옷을 나누던 자들을 기억하는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그 수치와 모욕을 받으셨다. 군사들의 손에 이끌려 해골이라 이르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가 고난의 길을 걷고 생명을 내어주신 것은 바로 우리 때문이다(벧전 2:24).

누가 원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주겠는가? 누가 자기를 대항하는 죄인을 위해 독자를 내어 주겠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죄인, 진흙으로 지음 받았으나 지으신 이를 경배하지 아니하고 피조물을 숭배하는 죄인, 그 죄인을 위해 “한 아들”을 주셨다. 이런 사랑은 극히 드문 진귀한 희생적 사랑이다.

2. 생명을 바친 희생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목숨이다. 체면과 명예, 돈과 쾌락은 생명의 위협 아래 모두 가치를 잃는다. 그래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 돈을 내놓고 체면을 내놓고 명예를 버리는 것이다.

“한 아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의 신성에 의지한 쉬운 죽음으로 여긴다. 하나님이셨기에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분이 죽음을 앞두고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는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배를 뒤집는 파도나 수천 군대처럼 많은 귀신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신 분이 죽음 앞에서는 고민하신다.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구하셨다. 이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눅 22:44).

단지 육체적인 죽음만 그분을 고민하게 한 것이 아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시험과 고난을 동일하게 경험하신 예수님은 죄의 결과물인 “죽음”을 죄 없는 하나님으로서 경험한다는 것의 공포와 충격을 앞두고 계셨다. 심문과 조롱, 핍박과 침 뱉음, 따귀와 멸시, 채찍, 무거운 십자가, 양손과 발에 박힌 굵은 못과 머리에 가시 면류관, 물과 피를 쏟으시고 질식과 경련의 고통을 몇 시간 동안 받으시다가 숨을 거두셨다.

하루에도 몇 명씩 수없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많은 사형수가 십자가 위에서 욕설을 퍼붓고 자기를 이 자리에 이르게 한 자와 그에 동조한 이들을 향해 저주를 쏟아붓는데 이 예수는 달랐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고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고백이었으며 오히려 그를 그 자리에 오르게 한 죄인들을 위한 용서와 사랑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일어난 지진과 두려운 일들이 그의 결백함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백부장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그렇다. 그분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한 아들”이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나뿐인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용감한 사랑, 이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희생적인 사랑이다.

3. 하나님 사랑 확증

원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 죽기까지 베푸는 사랑… 이 두 가지 사실 만으로도 예수님의 사랑은 위대하고 희귀한 사랑이다. 하지만 절대 불가능한 사랑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아주 드물지만,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준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번째 관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관점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든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누구의 사랑이 확증되었나? 하나님이다. 사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한 아들”은 임마누엘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 대 사람의 희생적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대 사람 사이의 희생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속에 창조주가 베푼 사랑이다. 이 엄청난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바울의 또 다른 표현처럼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엡 3:18-19).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가진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할 권리가 그에게 있다(신 32:39).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원하는 토기를 만들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창조주가 진흙으로 만든 모든 만물과 자기 형상을 따라 빚은 사람에 대한 권리가 하나님께 있다(창 2:7, 19).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6)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4)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8명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을 수장시켜 심판한다 해도 그분의 공의와 사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창조주가 자기를 대항하는 피조물을 제거하는 것은 무정하고 사랑이 없는 행위가 아니라 참으로 공의롭고 정의로운 처사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오직 토기장이의 권한에 달려있다.

사람간의 사랑에는 이러한 관점이 들어설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도 서로의 돈이나 명예를 앗아갈 권리도 없다. 물론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법이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여러 모양의 정부를 통해 악을 다스리도록 하셨지만 각 사람에게 그 처벌을 직접행사할 권리가 있지 않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위대하고 희귀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의 마땅하고 당연한 권리를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명백하게 말씀을 거역한 죄인의 벗은 몸에 가죽으로 옷을 입혀 주셨는가? 왜 금지한 과일을 따 먹은 여인을 그날 바로 죽이지 않으시고 그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는가? 왜 이방 신을 섬기던 한 사람을 택하여 땅과 후손과 축복을 영원히 약속하셨는가? 왜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한 나라의 도래를 약속하셨는가? 왜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위해 “한 아들”을 보내주셨는가? 그 아들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왕처럼 다스리게 하셨는가? 그 아들의 형상을 따라 영광과 존귀를 받게 하셨는가?

이 모든 질문에 천사들도 답을 얻기 원한다(벧전 1:12).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제공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임한 은혜, 그 아들의 죽음으로 확증된 것,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사랑”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기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다. 그 사랑 말고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희생적 사랑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화목 제물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셨다.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할수록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모든 이유를 변명으로 만들어버릴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받은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받은 상처가 아무리 크고 침해당한 권리가 아무리 거대해도 창조주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버리신 하늘 보좌의 영광과 그 모든 권리 앞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을 위해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때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얻는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희생을 묵상할 때 우리는 내가 가진 권리를 남을 위해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자기 권리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큰 위로를 경험한다. 누군가 나를 위해 죽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말이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아들을 위해 살고 싶지 않은가?

우리를 위해 한 아들을 주신 이에게 오늘도 우리 삶을 드리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