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07. 그의 이름, 영존하시는 아버지

아버지…

왜 선지자 이사야는 아버지 요셉에게서 태어난 사내 아기 이름을 “아버지”라고 예언했을까? 그것도 “영존하시는 아버지”!

영원(아드, “eternal”)이라는 속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여호와는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신다(출 15:18; 시 10:16; 45:7).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다(사 26:4). 하나님은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신다(사 57:15). 악인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시고(시 9:6) 땅의 기초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시 104:5). 하나님의 의는 영원히 서 있다(시 111:3; 112:9).

이사야는 한 아기의 또 다른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했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속성인 영원무궁하심을 가진 “아버지”가 한 아기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약속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이 말은 삼위일체 안에서만 설명 가능한 오묘한 진리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중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사실 그분은 만물의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관계를 설명한다. 자식 없는 아버지는 없다. 이사야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시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창조될 모든 만물의 아버지 되신다. 한 아기의 또 다른 정체성, 그분은 만물의 영원한 아버지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1. 나를 낳으신 아버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기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 없이 생명을 얻은 피조물은 없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사실 사람은 생명을 창조해내는 존재는 아니다. 생물학적 관계를 통해 생명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하는 특정한 인격을 직접 창조해내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창조하신다. 계획하신 그대로, 뜻하신 모양으로 뜻하신 때에 정확하게 창조하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 인간의 계획으로만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시 139:13)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5)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우리에게 약속된 “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다. 그분은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를 보셨고 우리의 인생을 다 계획하시고 미리 아시는 분이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 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만난 사람 중 그들 마음속 생각을 들켜서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속 생각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 전체를 들여다보신다. 모든 피조물의 시초를 아실뿐더러 그들의 생명을 시작하시고 말씀으로 그 생명을 붙드시고 호흡을 제공하시는 분이 바로 영존하시는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탁월함이 놀랍지 않은가? 주가 이 땅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이를 알았을까? 그들 눈앞에 서서 말하는 요셉의 아들 예수는 사실 그들을 창조한 아버지셨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을 말씀으로 붙들고 계신 분이었고 그들을 압제하는 거대 제국 로마를 세운 분이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설계하신 분이었다.
2. 나를 기르신 아버지

예수님은 사람이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3)

우리의 필요는 금세 요구가 된다.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안 될 것으로 둔갑한다. 미래의 필요가 공급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계획할 수 있지만, 미래의 필요를 오늘로 앞당겨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한 모습 중 하나다. 그런 연약함을 바라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 12:30)

아버지께서 아신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 설교자로서 나는 성도들에게 자주 외친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나와 같은 위치에서 나와 같은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영존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 자체가 태초 전부터 계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고,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신 분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요 1:14).

한 아기의 인성을 입으신 그분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공감하셨고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은 사람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아시고 공급하실 수 있었다. 영존하신 아버지이신 그분은 신실한 사랑으로 지으신 모든 만물을 기르신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면서 피조물을 돌보고 공급하는 일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여전히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셨다(히 1:3).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땅에 있는 인간 예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물 위를 걷고, 파도를 잠잠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일,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고, 악한 자를 심판하고, 죄를 사하는 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능력을 빌려와 이 땅에서 사용하신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다. 항상 아버지의 주권 아래 순종하셨지만, 그분은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셨다(히 1:3). 영존하시는 아버지 예수는 만물을 지은 아버지로서 만물을 돌보신 것이다. 그들을 고치고, 다스리고, 해방하고, 살리고, 훈계하고, 용납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항상 “내 아버지”라 부르며 그 존재를 자신과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면에서 만물의 아버지 되신다. 그런 면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를 아신다. 너희를 낳은 아버지로서 내가 다 알고 있는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완벽한 본이 되셨지만 동시에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이 어떻게 만물을 바라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다스리시고 돌보시는지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분은 만물을 기르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완벽하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였다. 그분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었다(요 14:9). 성자와 성부는 구분할 수 있으나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기 때문이다(요 10:30).

 

3. 나의 기업, 나의 사랑, 아버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것과 자신의 것을 완벽하게 공유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께 순종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순종하신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랑과 영광과 기쁨의 충만함은 어느 위격 하나 조금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공유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신다. 결국, 삼위일체의 놀라운 친밀한 관계에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업이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 주신 것은(갈 1:4)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서다(갈 2:20; 고후 5:21). 앞에 “내어 주심”은 죄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것이라면 뒤에 “내어 주심”은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라는 에너지나 물질을 건네주신 것이 아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는 것이다(요일 5:12).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 아니, 그보다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 것이 된다.”(마이클 리브스 & 팀 체스터, “종교개혁 핵심질문”, 166페이지에서 인용한 Luther’s Works, 31:298).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친히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공유한다. 그 사랑은 너무나 크고 넓고 깊고 높아서 영원히 우리를 만족시키고도 남는다(엡 3:18-19).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멋지고 아름다운 동산이 우리의 기업이 아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우리의 기업이다.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흐르는 영원무궁한 사랑이 영존하신 아버지를 통해 그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부어 넘친 바 되었다. 그래서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주 예수보다 더 사랑스러운 분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마리아는 자기 태에서 나온 한 아기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만일 누군가가 알았다면 이렇게 찬양했을 것이다.

마리아, 당신이 낳은 그 아기는 사실 당신을 낳은 아버지라오. 창세 전에 당신을 계획하고 심히 기묘하신 능력으로 당신을 지으셨다오. 요람에서 무덤까지 당신의 모든 날을 그의 책에 기록하고 당신의 머리칼도 세시며 매일 당신의 필요를 아시고 친히 공급하신 분이라오. 매 순간의 호흡을 주고 지혜를 내려주며 위로와 평강을 베풀고 사랑과 긍휼을 부어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라오.

이사야는 그분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노래한다오. 당신의 아들은 당신을 지으신 아버지요, 기르시는 아버지며, 당신의 영원한 기업과 사랑이신 아버지시라오.

우리가 이에 관해 뭐라 말하겠는가? 이렇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시 139:17-18)

성경에서 가장 간단하지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명령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이다. 항상, 범사에, 쉬지 말고라는 말 때문이다. 기뻐할 수 없을 때, 감사하기 힘든 시절에, 기도할 힘이 없을 때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여기에 비법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가능하다. 영존하신 아버지께서 나의 기업과 나의 사랑이 되셨으니 모든 환난과 시험, 고난과 슬픔, 무거운 짐도 다 그분 앞에서 가벼워진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그의 뜻대로 필요한 것을 그분의 완벽한 때에 공급하고 계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생명과 사랑의 근원 되신 그분 자체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 쉼 없이 그분을 의지하고 기도로 그분 앞에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