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6-7)

02: 한 아기

정말 신비롭고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반전시키실 때 사용하신 “성육신”이라는 방법은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지혜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9:6)
For to us a child is born(ESV)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바로잡을 위대하고 전능한 왕, 그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사실 모든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 노인까지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세상을 주름잡던 제국의 황제들도 한 아기였던 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이상할 일이 전혀 없고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린다(9:7). 보통 아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사야는 이 아기에 관해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임마누엘! 마태는 이렇게 그 뜻을 풀어 설명한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요한도 이 아기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 곧 하나님이라고 설명한다(요 1:1). 그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한 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본체의 형상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골 1:16)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히 1:3).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어그러지고 왜곡된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이다. 그분이 가진 능력과 지혜라면 순식간에 반전을 일으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말씀 하나로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니 공의와 정의를 온전히 세우시는 일을 영원히 하실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신비는 왜 하나님께서 “한 아기”로 오셨냐는 것이다.

아기는 미련하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다. 한 단어도 말로 낼 수 없다. 갓난아기는 배고플 때 울고 기저귀를 갈아야 할 때 울고 이유 없이 운다. 그것이 아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수단이다. 공의와 정의를 선포하기는커녕 “공의”의 “공” 발음하기까지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기는 의존적이다. 누군가를 구원할 위치에 절대 있지 않다.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젖이 없으면 굶어 죽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으면 추위, 더위, 위협 등에 속수무책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도 건사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아기…

왜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셨는가?

바울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취하신 방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아기로 태어나 성장하고 늙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 나셨고 우리를 위해 나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곧이어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이사야는 말한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때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한 아기”는 우리 가운데 우리를 위해 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1. 참된 모델
하나님과 본체이신 분께서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셨다. 한 아기가 되셨다. 전능하신 손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기로,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지신 분께서 우둔한 아기가 되셨다. 만물을 말씀으로 붙드시는 분이 만물 중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셨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낮아지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겸손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한다(빌 2:5).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서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빌 2:3). 하나님이 “한 아기”가 된 사건은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 닮아야 할 겸손의 본이다. 그 누가 하늘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 전지전능한 하나님에서 아무런 힘 없는 아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그분이 취하신 길을 역주행하는 교만을 품을 수 있겠는가?

 

2. 참된 위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는 대제사장. 그분은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다. 승천하셨다는 말은 곧 이 땅에 오셨다는 말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그 사실은 다음의 구절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그분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겠는가? 어떻게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다고 말하실 수 있겠는가?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셔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장 과정 중에 죄로 물든 세상과 사람에게서 오는 수많은 고통과 시험을 받으셨으니 가능한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사정과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우리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온전히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는 예수께서 중보자가 되시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은혜를 얻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대변인, 변호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완벽하게 설명하실 수 있다. “아버지, 제가 경험해보니 사람은 참 연약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께 긍휼을 바라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갈 수 있는 담대한 발걸음은 오직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 우리의 입장에 서보신 분,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때문에 가능하다.

 

3. 참된 속죄

예수께서 “한 아기”로 오셔야 했던 이유 중 성경이 강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처음 “육신”은 우리를 가리킨다. 우리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의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말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셔야 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육신으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 때문에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고(“성육신”) 그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희생양을 끌고 온 죄인의 죄가 점 없고 흠 없는 양에게 전가된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예수께 인류의 죄가 전가되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죽으셨다(롬 6:23).

이 놀라운 대속의 사건은 영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었다. 그들을 향한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가 대신 이루셨고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가 옷 입혀졌기 때문이다(롬 13:14).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은혜로운 계획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검을 가지고 자기를 대항하는 죄인들을 무참히 죽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세상에 온전히 세우는 방법은 무력과 권력으로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고후 5:17). 공의는 온전히 우리 가운데 우리를 위해 나신 아들에게 쏟아졌고 사랑은 온전히 그 죄의 원래 주인인 우리에게 쏟아졌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한 아기”가 되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자. 그분이 어떤 겸손의 본을 보이셨는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는지, 나의 처지를 모두 이해하시며 중보하고 계시는지 깊이 묵상하자. 그 무궁하고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자(벧후 3:18). 그리고 모든 영광을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분께 돌려드리자. “한 아기” 예수를 본 목자들처럼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자(눅 2:20).

나를 위해 종의 형체를 입으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항상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완벽한 중보자가 되어 주시는 대제사장, 내 대신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엎드려 절하라,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라 우리를 위하여 나신 “한 아기” 예수께!

그리고 그분을 따라 살자.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겸손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 마음을 본받아 각자 자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일도 돌아본다(빌 2:4). 서로 섬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것처럼 성도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일에 우리도 힘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대신 치르신 죄의 값을 기억하며 다시는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롬 8:12).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소욕에 따라 행한다(갈 5:18). 하나님이 “한 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 엄청난 희생과 사랑을 기억함으로 그가 우리를 구속하신 옛사람의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동시에 그가 우리를 불러내신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수행하는 특권을 부여한다.

우리를 위해 “한 아기”가 되신 겸손의 왕을 위해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은혜로운 대제사장을 위해
우리는 누구를 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치러야 할 율법의 요구를 대신 이루신 사랑의 구세주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아기”에게 각각 선물을 바치며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들처럼
당신이 오늘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 선다면 당신은 무엇을 드리기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