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로 제자 훈련에 필요한 충분한 영적 공급이 이루어질까? 이 질문을 곡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주일 설교가 필요 없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은혜로 선물하신 은사(자)를 통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데(엡 4:11), 설교로 주어지는 말씀 또한 매우 유용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말씀은 언제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위치에 있다(딤후 4;2). 그러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주일 설교로 제자 훈련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서 지금껏 심층 리뷰해 온 격자와 덩굴의 관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샬과 페인은 목사가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는 주요 관점으로 1) 서비스 제공 성직자, 2) CEO, 3) 훈련자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 관점은 교회가 시작하고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1.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직자

이 관점은 고전적인 개혁주의-복음주의 모델인데, 안수받은 목사가 그에게 맡겨진 양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양들은 목사의 필요를 돌보고, 목사는 양들의 필요를 제공한다(고전 9:14). 주일 설교 및 성례 집례 등을 통하여 말씀을 먹인다. 주일 모임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방 및 상담으로 더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돌보기도 한다. 요컨대 목사는 ‘성직자’라고 불리든 아니든 전문적인 사역자가 되어 주로 정기적인 말씀 사역을 중심으로 성도를 섬긴다.

그러나 마샬과 페인은 이 관점이 갖는 매우 실제적인 단점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목사 개인의 은사와 능력에 교회 사역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꾼에게 주신 설교 은사의 분량과 목회 은사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많은 성도가 실제적인 훈련을 받게 될지, 성장하게 될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두 저자는 보통 한 사람의 목사가 효과적으로 돌볼 수 있는 성도의 수가 약 100-150명이라고 했다.

나아가 이 관점의 커다란 부작용으로 ‘소비주의’를 꼽았다. 이 시대 만연한 소비주의 정신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훈련된 전문가에게 비용을 지급하고 모든 것을 그 전문가에게 기대하며 요구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도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 전문적인 서비스 제공자인 목사에게 비용을 내고 그들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곳이고, 주일 예배 및 집회 중 소비자인 나의 취향과 기호에 벗어나는 서비스가 있으면 금세 불평과 비판의 별점을 매긴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회 문화가 형성된다. 성도 간 위로와 격려, 돌봄과 권면은 부차적인 일이 되고, 목사와 성도 간의 관계에서만 영적 필요가 채워진다고 믿게 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제자가 아니라 영적 소비자들을 양산하고, 복음 전파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상태를 유지 및 보수하는 일에 몰두하게 한다.

2. CEO

다음으로 마샬과 페인이 언급한 관점은 CEO 관점이다. 1970-80년대 교회 성장 운동이 일으킨 변화의 결과로 많은 목사들이 자신을 회사를 경영하는 전문 경영인처럼 여기기 시작했다고 저자들은 밝힌다. 목사는 여전히 전문적인 성직자이고 설교와 목회적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전념하지만,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제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것”에서 “많은 직원과 다양한 서비스를 가진 기업을 관리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교회가 작았을 땐, 고전적인 모델로 충분했지만, 성장을 거두고 나서는 그렇게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는 하나의 ‘끌어들이는 상품’이 되었다. 방문자들과 새로 온 고객들에게 더 매력적인 음악과 장식과 설교를 보여야만 하니까. 소비주의가 소비자 중심주의로 진화하면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듣기 편하고 거북하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것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비그리스도인을 위한 행사, 세미나, 프로그램을 늘린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복음을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목사 한 사람이 500여 명의 성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돌보고 기도하며 어려운 시간에 찾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상한 것이 바로 소그룹이다. 구성원들이 소그룹 안에서 돌봄 받을 수 있도록 관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회중의 참여를 촉진한다는 면에서 좋은 일이다. 목사에게만 맡겨진 양육과 돌봄의 일이 성도에게도 맡겨진 것이고, 이는 성경이 서로 사랑하고 돌볼 것을 모든 교회 구성원에게 요구한다는 면에서 올바른 일이다. 실제로 교회 성장 연구에 따르면 어떤 성도가 교회 더해진 첫 6개월 안에 어떤 역할이나 사역이 맡겨질 때, 그가 장기적인 구성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한 가지 현상은 목사가 덩굴의 일보다 격자의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된다는 것이다. 덩굴이 성장할수록, 격자를 고치고 세우며 확장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으니까. 다시 말해 목사가 말씀을 준비하고 성도를 훈련하는 일보다 교회 경영, 각종 회의 등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모델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 교회가 윌로우 크릭인데, 빌 하이벨스 담임목사는 그들의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교회 모델이 그리스도의 제자를 실제적으로 훈련하고 성장하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CEO 모델의 큰 단점이다. 매력적인 설교와 서비스, 효과적인 돌봄과 운영 방식이 반드시 영적 성장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성도가 참여하고 있는가? 일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서 그치면 안 된다. 그들이 제자로서 성장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을 얻어야 한다.

3. 훈련자

훈련자 모델을 다루기 전에, 먼저 오해하지 말자. 목사가 성도를 전적으로 섬기고 돌보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성도들이 그들의 목회자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영적 돌봄을 요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교회 규모가 생기면 소그룹이 필요한 것도 맞고, 회중이 커지고 다양해질수록 찬양, 말씀 등 다양한 사역이 은사 있는 이들에게 맡겨지면서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마샬과 페인이 \<격자와 덩굴>에서 주목하는 문제는 단순히 시대와 교회 성장에 따라 목회 관점이 바뀌었다는 게 아니다. 격자의 일과 덩굴의 일 중 후자가 더 중요하고, 격자의 일이 덩굴의 일을 위한 것이라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 관점을 바르게 인식한 모델이 바로 훈련자 모델이다.

“참된 영적 성장은 오직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실 때 온다”라는 명제가 지금껏 이 책이 강조해 온 원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씀을 부지런히 전달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영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일 설교를 전달할 책임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달할 책임과 특권을 갖는다. 주일 예배는 그런 면에서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면서 동시에 성도가 서로를 영적으로 자라나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섬기는 훈련장이 된다. 성도는 소비하러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러(성장시키러) 교회 온다. 목사의 과업은 잘 준비된 좋은 설교를 전달하고 교회 여러 관리가 필요한 대상 또는 기관을 손보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볼 때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달하여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일하시기를 구하는 것이고, 성도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고 자라나게 하는 일에 긴밀히 동역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성경은 목사를 주신 목적을 가리켜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엡 4:12).

교회로 모일 때, 성도들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와 예배와 믿음으로 그분께 반응하며, 서로를 제자로 삼는 일’에 헌신한다. 교회 행사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누군가를 돕고 위로하고 권면하며 세워주는 일을 한다. 가령 홀로 식사 중인 성도를 찾아 그와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영적인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주일 예배는 나머지 일주일 제자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는 기회가 된다. 교회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아니라 교회로서 복음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다.

결론

결론적으로 마샬과 페인이 ‘주일 설교로 충분하지 않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제자 훈련에 있어서 설교가 필요 없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강력하고, 신실하고, 설득력 있는 성경 강해의 설교는 우리의 회중들의 삶과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고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공적 설교는 회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역이 세워지는 기반과 기초”라고도 했다. 하지만 주일 설교를 전부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출발점이고 말씀 사역의 틀과 방향을 설정하며, 성도를 가르치고, 도전하고, 격려하면서, 결국 말씀을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누고, 살아내는 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났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각 성도가 다른 성도에게 말씀을 말하고, 말씀으로 격려하고, 사랑과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두 저자는 사역의 성패를 논할 때, 회중의 숫자나 프로그램 참여 인원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이런 질문을 던지라고 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숙해지고 있는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가?
그들이 제자를 만드는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효율성과 구조, 프로그램 중심의 사역이 아니라 사람 중심, 관계 중심, 말씀 중심의 사역을 추구해야한다. 이 둘이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단과 목적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격자가 아니라 덩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