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샬과 페인은 9장에서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하여 복음 동역자들을 반드시 세우라고 권면하면서, 그러나 그 일을 주체적으로 맡아서 해야 할 목회자가 어떤 방식으로 세워지는지 물었다. 10장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워진다고 믿는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라는 요청은 “추수하는 주인” 곧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지고(눅 10:2), 목사와 교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교회에 주신 은사라고 성경은 밝힌다(엡 4:10-12). 그러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없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순종해야 할 어떤 과정과 수단 없이 하늘에서 목회자들을 내려보내 주시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두 저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수단을 통해, 어떤 통로를 통해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과 전도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는가?”라고 묻고,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적합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그들에게 복음 사역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도록 도전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을 보면, 적어도 네 세대의 사역 계승을 염두에 두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 디모데, 충성된 사람들,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 목회자를 세우는 일은 신학교나 교단의 일이 아니라 사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에서 이미 그 역할로 섬기고 있는 목회자의 일이다.
네 가지 흔한 질문
<격자와 덩굴>에서 두 저자는 사역자 발굴에 관하여 흔히 제기되는 질문과 반론을 먼저 다룬다.
질문1: 모든 신자가 섬기도록 부름받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사역으로 특별히 부름받아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부르심(call)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기를 원하셔서 개인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확신을 주시는 것으로 좁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부르심’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거의 항상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은혜로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시는 모든 것을 통틀어 묘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에 따른 모든 특권과 책임이 따른다(롬 8:28-30; 고전 1:9; 엡 1:18; 4:1; 빌 3:14; 골 3:15; 살후 1:11; 딤후 1:9; 벧전 2:9).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위임받은 사역자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기 삶을 드리고 거룩함과 의로움 가운데 살아가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마샬과 페인이 <격자와 덩굴>에서 모든 성도가 덩굴 일꾼이 되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르치고 인도하고 복음 확장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꾼을 세우시는 장면을 발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가르쳐야 하지만(골 3:16), 그들이 다 교사는 아니고(고전 12:29; 약 3:1),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섬겨야 하지만(벧전 4:10-11), 어떤 사람은 특별히 장로, 감독, 집사 등으로 섬긴다(딤전 3:1, 8; 딛 1:7; 빌 1:1). 이것은 전임이냐 시간제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급여를 받고 안 받고의 차이도 아니다. 당연히 계급과 지위의 구별도 아니고, 은사가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다. 은사가 주어지지 않은 성도는 없기 때문이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신념, 인격, 역량 때문에 특별히 구분되고, 인정받고, 선택되어, 하나님 아래서 특정한 사역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
그러면 누가 그런 신념, 인격, 역량을 갖추었는가? 그것을 숙고하고 분별하여 세우는 과정을 사람이 감당한다. 동시에 그러한 신념, 인격, 역량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목회자를 세우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질문2: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낄 때까지, 전임 사역을 권하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목회자로 세워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부르심’(calling)을 말한다.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이사야가 하늘 성전 앞에서 경험한 개인적 소명을 동경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사역을 선택한 결정의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보통 우리는 사역자를 세울 때, 누군가가 ‘나는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기를 기다린다. ‘목회자(또는 선교사)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을 느낍니다’라고 말하는 대상을 목회자 후보로 두고 적합성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적일까?
마샬과 페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성경 어디에도 사역을 위한 내적인 부르심을 요구하거나 그런 사례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복음 사역자들(선교사들)을 세우는 일을 다른 장로들(목회자들)이 한다. 디모데는 장로들에 의하여 임명받았고(딤전 4:14), 디도 또한 바울을 통해 그레데 사역이 맡겨졌다. 그레데 각 성의 장로는 디도가, 사도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세워야했다(딛 1:5-9).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이방인에게 선포하기 위해 파송된 것도 안디옥 교회 장로들을 통해 이루어졌다(행 13장). 요컨대 “하나님은 사람들을 특정한 사역이나 책임으로 부르시는데, 그 일을 기존의 공인된 사역자들을 통해 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틴 루터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부르신다. 수단을 통해 부르시거나, 수단 없이 직접 부르신다”라고 말했다. 신약 성경에서 목회자를 부르시는 방식이 전자라면, 모세나 이사야의 경우는 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단 없이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후임 사역자들과 동역자들을 수단을 통해 세웠다. 오늘날 일꾼이 세워지는 방식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가 ‘부르심을 느끼기’를 기다리면서 가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적합한 사람을 찾고, 도전하고, 시험하여 복음 사역을 위해 구별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질문3: 돈을 받지 않아도 ‘복음 사역’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 전임 유급 사역의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바울도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했고,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가르칠 때도, 자기 손으로 일하여 필요를 채웠다(행 18:1-5; 20:31-34).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한다(고전 9:14). 바울이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은 복음이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였고,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 교회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멈추고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니까 바울은 교회의 물질적 공급을 받는 것이 합당치 않아서 스스로 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 지역에 편만하게 복음이 전달되게 하려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마샬과 페인은 ‘자비량 사역’이 낭만적으로 보여도,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교회를 목양하는 무거운 책임과 세속 직업의 일상적인 노동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고, 그것이 절대로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전임 사역이 가능하도록 지원하여 더 많은 복음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교회가 힘써야 한다고 권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설명하며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에 전달하는 일에는 충분한 시간이 요구된다.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적용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는 일꾼이 반드시 교회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존 녹스는 그래서 ‘이 사역이 사라지면 기독교도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지금도 합당한 일꾼이 없는 교회에서 장기적으로 발견되는 명백한 문제다.
필자는 자비량 사역의 한계를 분석한 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대되는 은사와 역량 안에서는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교회에 전임으로 말씀 사역에 삶을 바치는 일꾼이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교회에 매우 큰 영적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질문4: 세속 직업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낮추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주님의 일꾼이라고 하지만, 어떤 성도를 특별한 일꾼이라고 부르면, 나머지 성도들은 평범한 일꾼이 되고 만다. 전임 사역을 고귀한 부르심이라고 하면, 직업을 갖고 일하는 성도들은 그렇지 못한 부르심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목사와 평신도의 구분이 그런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실제로 이런 관점이 교회 현실 가운데 반영되는 이유는 세속적인 직업관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샬과 페인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실현이나 명성, 개인적인 인정을 얻기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들을 섬기고, 짐이 되지 않으며, 나누기 위해 일한다”라고 말했다(엡 4:28; 딤전 5:8).
저자들은 우리가 목사와 성도를 다른 종류의 부르심, 다른 계급의 섬김과 봉사로 보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하면서, 동시에 세속 직업과 제자로서의 일을 같은 것으로 여기지도 말라고 했다. 물론, 우리는 직업 소명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그러나 덩굴의 일, 즉 누군가를 제자로 삼고 훈련하는 일은 모든 제자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회계사나 목수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직업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제자를 만드는 일과 관련이 있다. 저자들은 또한 교회가 팀 사역을 하고 있음을 상기한다. 전임 사역자가 그의 역량을 발휘하고 은사대로 섬길 때, 모든 성도가 유익을 얻고 함께 역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교회 모든 지체가 함께 제자를 만드는 팀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닌가!
주목할 만한 사람들
결론적으로 마샬과 페인은 교회가 인재 발굴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세대의 목회자들은 다음 세대 사역자들을 부르고, 선택하고, 세워야 할 책임이 있다.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할 은사와 인격을 갖춘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그 대상이 될까? 저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자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헌신하는 데 충실한 사람
- 평판과 경건한 삶의 본에 있어서 흠이 없는 사람
-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사람
- 가정을 잘 다스리고 이끌어 온 것이 입증된 사람
추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 겸손하며 가르침을 받을 줄 아는 사람
- 신실하고 믿을만한 사람
- 부탁받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
- 전도에 힘쓰는 사람
- 지도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보이는 사람
- 다른 사람이 선한 영향력을 받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
- 배우자와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
-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강인한 사람
- 비판과 실망과 실패를 견딜 수 있는 사람
이런 잠재력을 가진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사역 인턴십(Ministry Apprenticeship)이고, 저자들은 그것을 11장에서 나누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