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코리아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맞춰 이른바 ‘탱크데이’라는 마케팅을 했다. 제목부터 큰 문제점이 드러난다. 군부대와 탱크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역사적 참극이 아니던가. 텀블러의 명칭이 탱크이고 물탱크에서 영감받은 제조사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더 큰 문제는 “책상에 탁!”이라는 홍보 문구였는데, 박종열 열사 고문치사 사건 당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발표했던 내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판매하는 탱크 텀블러를 책상에 두고 쓰는 용도로 판매하려고 만든 문구였다고 설명했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결국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그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라고 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용납될 수도 없는 부적절한 마케팅’이었다고 인정하면서,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 유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상처를 드렸다’며 머리 숙여 사죄했다. 이벤트에 관여한 직원을 전원 직무 배제하고 대표와 담당 임원은 해임 조치까지 했으며, 경찰 수사에서 고의성이 입증될 경우 즉시 징계 조치 및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을 약속했다.
의도나 목적이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민감한 역사적 문제를 떠올리게 하여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불편한 마음을 갖게 만든 것은 잘못한 것이 맞다. 하지만,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사건이 커져 버렸다. 사람들은 스타벅스 불매 운동을 벌이고, 머그잔이나 텀블러 등을 깨부수는 영상을 찍어 공유한다. 정치권에서는 이 사태를 진영싸움에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고 하고, 심지어 정부는 스타벅스가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공공사업을 잠정 보류하는데 이르렀다. 이제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사진을 올리거나 모바일 상품권으로 선물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고 지탄받을 일이 되어버렸다. 잘못을 했고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진 일에 관하여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옳을까?
보통 이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네가 당해보지 않은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피해자의 심정을 네가 다 알기는 해?’라는 답변이 날아오기 마련이다. 참고로, 필자는 1980년 4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갓태어난 손자를 부모님께 보여드리려고 전라남도 광주로 내려갔고, 그때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도시를 한 달 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거기서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 경험한 아버지는 시위하다 쫓기던 청년을 집으로 피신시켜 구조해준 적도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이 실제로 사건을 통해 목숨을 잃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역사적 이해나 경험이 조금도 없이 이론으로만 쏟아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
칼 트루먼은 <확신의 위기>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가 “표현적 개인주의”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부흥과개혁사, 2025). “표현적 개인주의는 모든 사람이 일련의 내적 감정, 욕구, 정서에 의해 구성된다는 개념이다. 진정한 ‘나’는 몸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며, 따라서 이런 내면의 감정에 따라 겉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지극히 참으로 나 자신이다”(14-5pp). 트루먼은 트렌스젠더리즘 현상에서 이와 같은 표현적 개인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내가 느끼는 것이 곧 현실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성과 다른 성을 내가 원하고 느끼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트루먼은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라는 책에서 “우리가 사는 현대의 사회적 상상의 직관적 도덕 체계는 피해자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자아성을 심리적 각도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부흥과개혁사, 2026, 75p). 그는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도덕 기준은 관련 개인들의 행복감에 기여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라고 판단하면서 “그러므로 윤리는 감정의 작용이 된다”라고 결론 내렸다(93p). 나아가 트루먼은 “진실은 우리가 오늘날 모든 것이 정치화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과, 공공 영역에서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참여하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416p). 현대 사회를 참으로 통찰력 있게 조명했다.
트루먼이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피해자성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피해자가 무엇을 얼마큼 느끼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과 인과관계가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것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과 상관없이 피해자가 느꼈다면 그게 곧 사실이다. 누구도 그 앞에서 함부로 자기 의견을 얘기할 수 없다. 게다가 실제로 얼마큼 피해를 입었는지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심리적 각도로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피해자가 느끼지 않을 때까지 잘못은 사라지지 않는다. 윤리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가 합의한 법도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경위도 아니며 “감정”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정치화되어 개인은 어떻게 느낄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지 않아서 다른 입장을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법적 제재를 받는 일이 되기까지 한다. 트루먼의 책은 요약본으로도 나왔는데, 제목이 <이상한 신세계>다. 그렇다. 우리는 정말 이상한 신세계에 살고 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명령한다(롬 12:2). 이상한 신세계를 사는 우리가 잘못된 사상을 따르고 세속적인 도덕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특별히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 세대의 본받지 말아야 할 정신을 발견한다. 주인에게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는데,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나가서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다. 동료는 진정으로 사과했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마 18:29). 그러나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마 18:30). 주인은 그를 가리켜 “악한 종”이라고 불렀다(마 18:32). 예수님의 비유는 용서에 관한 것이다. 악한 종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받은 상처가(여기서는 금전적 빚) 너무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가 만 달란트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용서를 받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가 용서받은 사실은 그가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감정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지만,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가(느낌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실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님은 ‘네가 얼마나 상처가 크면 그러겠니?’라고 피해자 중심적으로 반응하셨나? 그의 심리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보셨나? 그렇지 않다.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경고하셨다(마 18:35).
물론, 우리는 피해자의 상처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고 명령한다(롬 12:15). 그러나 상처받은 그 마음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처받은 사람이나 상처 준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옳다고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할 기준은 하나님 말씀뿐이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상처받았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을 합당한 이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 진정한 용서를 빌었음에도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충분히 괜찮아질 때까지는 여전히 죄인이 되어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상한 신세계의 법칙은 결국 모두를 적대적으로 만들고 보복하게 한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기만 하거나 주기만 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상황이 뒤바뀌면 이전에 감정에 치우쳐 쏟아낸 모든 불필요한 해악을 되갚아주기가 쉽다. 그렇게 세상은 용서와 화해가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한 번 잘못하기만 하면 된통 당하고, 그래서 상대가 잘못하기를 노리며 앙갚음하려는 삭막한 모습으로 변질된다.
스타벅스 코리아의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견해는 다양할 수 있다. 필자는 다만 그 일을 우리 일상으로 가지고 와서 적용하고 싶은 원칙 하나를 마지막으로 밝히고 싶다. 이 사건을 통하여 칼 트루먼이 진단 및 분석한 이 세대의 악한 풍조를 발견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 풍조에 따라 이웃을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에 따라 이웃을 대해야 한다. 우리 감정이 마음의 권좌를 찬탈하도록 두지 말라.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도록 내어드리라. 표현적 개인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이들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자들이다. 상처받았는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구한다(고후 1:3). 단순히 당신의 상처가 아물고 괜찮아지는 수준이 아니라 거기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도록 온전히 치유해 주시기를 구한다.
복음은 악한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이전에 악한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전적인 타락으로 어그러지고 치우친 내 생각, 감정, 의지를 다시금 삶의 주권자로 삼는 것은 복음을 역행하는 일이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복음을 거스르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느끼느냐가 곧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것을 통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이 그렇지 않은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십자가의 쓴 잔을 옮겨달라고 간청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영광과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마음을 끝까지 다스리고 골고다를 오르지 않으셨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