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1장. 교회 사역은 왜 필요한가?
제자 삼는 실제적인 일이 덩굴의 일이라면, 그 일을 돕는 여러 도구를 격자의 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둘 다 없으면 안 된다. 격자가 없으면 무성해진 덩굴이 무너지면서 다 죽는다. 덩굴이 없는 격자는 쓸데없다. 마찬가지로 제자 삼는 일도 중요하고 그 일을 돕는 교회의 모든 형식과 프로그램과 기관 및 사역도 중요하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격자가 덩굴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표, 즉 제자 삼는 일의 최우선 순위를 잊지 말고, 그것을 위한 격자를 만들라.

2장. 일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다. 교회는 프로그램이나 행사 운영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훈련하는 것으로, 사람을 사용하는 것에서 성장시키는 것으로, 공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꾼을 훈련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이 아닌 사람의 진일보를 위하여, 직분자 중심 사역이 아닌 팀 사역으로, 교회 정치를 세우기보다는 동역으로, 훈련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 교회 훈련을 중심으로, 단기적인 계획이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관리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실제 사역을 위한 노력으로, 내 교회 성장이 아니라 복음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사역의 사고 전환을 해야 한다.

3장.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덩굴을 심고 기르신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교회의 예시는 이를 확증한다.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에 항상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역사를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지금도 하신다.

4장. 모든 신자가 덩굴 일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제자를 부르시고 기르신다. 그리고 모든 신자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달할 것을 명령하셨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에 예외인 그리스도의 제자는 없다. 성경 여러 곳에서 “서로” 명령어를 통하여 모든 신자가 말씀으로 서로를 권면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세워주라고 요구한다(엡 4:15; 골 3:16; 히 10:24-5). 물론 모든 신자가 공적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신자는 가정, 교회, 사회에서 각각 자기 분량에 따라 일대일, 소그룹 혹은 더 큰 규모에 맞는 말씀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제자 삼는 일을 지금 하는 일에 더하란 말인가?

저자는 이제 올바른 사역의 사고 전환을 일으킨 목회자가 어떻게 성도를 말씀 사역자로 세울 것인지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가 제자 삼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신자에겐 너무 큰 부담이 되지 않을까 의문을 품는 독자를 위하여 이렇게 묻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겨우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밖에 나가 복음을 나누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믿음 안에서 격려하지 않거나, ‘사역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죄책감을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단지 평균적인,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그래서 5장의 제목이 “죄책감인가, 아니면 은혜인가?”이다. 저자는 죄책감이 아니라 은혜라고 답한다. 그 이유는 제자 삼는 일은 다른 말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신자가 덤으로 짊어져야 할 과중한 의무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에 합당한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협력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다. 거기서 그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는데,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빌 1:5). “참여”를 뜻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인데, 보통 ‘교제’로 번역된다.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과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교제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공부 모임을 가졌다는 말도 아니다. 그들도 바울처럼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으로 함께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그렇게 일상 가운데 동역에 힘쓸 것을 권면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27–30)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곧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난을 각오하고 복음 선포하는 일에 매진하는 그 사역에 빌립보 성도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바울의 쓸 것을 보내거나 그를 위하여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요구한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빌립보 성도들을 바울처럼 똑같이 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들도 바울처럼 주와 복음을 위해 살라고 부르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으로 인해 핍박받고 고난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막 8:34). 모습과 분량은 달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그 은헤에 합당한 반응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을 기뻐한다.

저자는 그래서 복음 동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음 동역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하늘 시민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것, 복음이 변호되고 선포되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며 힘쓰는 것, 그리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갈등과 싸움과 박해를 담대하게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자가 참여했던 한 교회는 교회의 회원제를 없애고(membership), 동역자(partnership) 개념을 도입했다고 한다. 회원은 성도를 적극적인 생산자가 아니라 소극적인 소비자로 바꿀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단순히 용어를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 전환은 반드시 필요하다. 소수의 일꾼들만이 아니라 성도 전체가 복음 사역을 위해 함께 동역하라는 말이 불필요한 짐을 억지로 지우는 것이 아니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 모든 자의 마땅한 반응이다.

은혜? 그렇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사는 삶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거나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자들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하시고 값없이 은혜로 영원히 의롭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일꾼만 이런 은혜를 얻은 게 아니다. 모든 성도가 얻었다. 그리고 일꾼만 그 은혜의 영광을 삶으로 찬송하게 하신 게 아니다. 모든 성도가 예배의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해야 한다. 저자는 그래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바울은 이 싸움에서 그들의 지도자이자 본보기이자 동료 군사였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우리가 보는 패턴이다. 지도자들, 목회자들, 장로들은 가르치고, 경고하고, 책망하고, 격려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감독자이며 조직자이며, 보호자이며 동원자이며, 교사이며 본보기이다. 그들은 나머지 복음 동역자들이 덩굴 일—곧 기도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제공한다.

그러나 깊은 수준에서, 모든 목회자들과 장로들도 단지 동역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본질이나 지위에서 다른 존재가 아니며, 근본적으로 다른 과업을 가진 것도 아니다—마치 그들이 실제 ‘선수들’이고 나머지 회중은 관중이나 지원 인력인 것처럼 말이다. 목회자나 장로는 특정한 책임을 부여받아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복음 동역을 위해 준비시키는 덩굴 일꾼이다.

그러면 목회자와 성도는 어떻게 복음 사역에 동역할 수 있을까? 목회자는 어떻게 덩굴 일꾼을 훈련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충성스럽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