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행 16:14-15)
성경 밖에서 성령의 이차적 음성을(내면적 음성이든 외적으로 나타나는 계시든) 듣고자 애쓰는 사람 혹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 듣기를 체험하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성경을 통해 행하시는 역사를 과소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거듭남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반적인 성경 듣기와 전하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롬 10:14-15).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기도하는 곳을 찾다가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 모인 여자들에게 ‘말’을 했다. 복음을 말로 전달하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행위가 죄로 눈멀고 하나님과 단절된 루디아의 죽은 영혼을 살아나게 했는데, 이는 “주께서” 행하신 초자연적 역사였다.
베드로는 성도가 거듭난 것이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선포했다(벧전 1:23).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죄인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실 뿐만 아니라 항상 그 역사를 이루어 성도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데, “너희에게 전한 복음” 곧 일반적인 말씀 선포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신다(벧전 1:24-25).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에게 행하신 모든 일이 초자연적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살리신 영혼에게 날마다 베푸시는 역사도 초자연적이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등급을 매기려 해서는 안 된다. 여덟 명의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와 짐승을 엄청난 폭우와 지각변동을 통해 모두 심판하신 무섭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만큼이나 바울이 전한 말로 루디아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크고 위대하다.
요컨대, 일반적인 성경 읽기와 해석, 묵상과 적용의 과정 또한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이고 성령 체험이다.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성경을 읽고 삶에 적용하는 모든 과정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셈이고, 오롯이 자기 지혜와 능력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있고 옛 자아를 죽이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을 너끈히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알게하시는 하나님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9-1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밝혔다(고전 2:1-5). 이 말을 이분법적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는 바울의 말에 지혜가 없었고 설득력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우리의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을 통해 전달되지만, 그 수단을 통해 청자에게 밝히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이후 바울이 설명한 내용을 보면, 우리 눈과 귀, 마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성령 하나님이 보이시고 알게 하셨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지혜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조명”이라고 부른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밝히 알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가리킨다.
우리가 성경을 열어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조명’하신다. 역사적-문법적 성경 해석의 원칙에 따라 지혜롭게 말씀을 읽고 해석하여 성령께서 의도하신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일반적인 방식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진리와 은혜를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을 열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원케하시고 살게하시는 하나님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성령님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진리를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뜻에 합당한 반응을 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이 말씀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전, 모든 죄인은 “다 치우쳐 함께 더려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하나도 없”었다(시 14:3). 죄인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조명하심 없이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선을 행하지도 않고 치우쳐 무익한 삶을 산다(인도하심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뜻을 찾고 싶은 욕구나 그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본성적으로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 어리석고 무익한 삶을 살기 원한다는 것이 문제다. 단순히 알지 못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의 문제다. 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고 미워하시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고 성령의 능력으로 효력을 얻게 하신 새언약의 약속은 죄인의 본질적인 문제를 말끔히 해소한다. 하나님은 자기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히 8:10).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비추시고 알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단순히 죄인의 무지한 마음에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성령은 죄인의 욕구를 바꾸신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뜻을 거스르는 죄를 미워하게 하신다.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라고 말했다(빌 1:6).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선)이 무엇인지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선포한다(빌 2:13). 또다시 이분법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책임이나 의무가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바로 전 구절에서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했다(빌 2:12). 바울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따르기 원하여 기쁨으로 순종할 때, 그 일반적인 과정을 통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내 안에 발견되는 모든 선한 욕구의 출처는 성령님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원함은 다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여 맺는 삶의 모든 열매는 우리 힘으로 맺는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맺는 열매다(“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결론적으로 성경 곧 하나님의 완벽하고 오류가 없고 그 자체로 충분한 하나님의 계시 밖에서 성령의 이차적 음성이나 체험을 추구하려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시며 성령을 체험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매우 특별하고 이례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실 수도 있지만(가능성), 하나님은 거의 대부분 일반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신다(현재성). 그러나 성경을 읽고 삶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결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덜 경이롭게 하거나 시시하게 만들지 않는다. 돌같은 사람의 마음,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의 견고한 반항심이 그 일반적인 방식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드럽게 녹아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고 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역사만큼 위대한 역사는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열며 성령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 음성을 듣고 따를 수 있다.
혹자는 ‘그런데 왜 나의 성경 읽기는 이렇게 건조하고 형식적인가?’ ‘주의 말씀을 열 때, 왜 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답을 다음 칼럼을 통해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