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고, 다음 세대를 일으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축복을 이어받게 하셨다. 그들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전 세대가 실패한 것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했다. 단지 지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세대뿐만 아니라 그 자녀와 후손까지 장구하여지려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분의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켜야 했고, 그럴 때 그들이 복을 받고 번성하게 될 것이 약속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라고 강력하게 권면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쉐마로 알려진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백성에게 반드시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분이다. 다른 우상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으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언약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상의 음성이나 이방인의 말, 심지어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

“들으라”는 명령에 이어서 나오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설명은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의 문제를 바르게 조명해 준다. 모세는 이렇게 들으라고 말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하나님의 백성이 그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은 모세가 명한(그리고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자녀에게 언제 어디서나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말씀,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해야 할 말씀은 이차적 음성(성령의 외적, 내적 음성)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전 세대에게 주어진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두 번째 세대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 감동, 깨달음, 특별 계시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이 힘써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은 이미 나타났고 선포된 객관적인 말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중 많은 이들이 객관적인 말씀을 제쳐두고 주관적인 음성을 들으려 한다. 이는 두 가지 분명한 문제를 낳는데, 자기 생각과 하나님 생각을 엄격히 구분하여 내면에서 들리는 하나님 음성을 들으려는 1) 분별의 문제(우리에겐 이런 능력이 없다). 그리고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 계시보다 한 차원 높은 특별한(?) 성령의 내적/외적 음성을 선호하게 되는 2) 실천의 문제다. 각각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의 오랜 이단성을 따른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들은 신실하지 않거나 덜 성숙했거나 저급한(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취급받는다.

여기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꼬리를 잇는다. 바로 권위의 문제다.

3. 권위의 문제: 기록된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이 다를 때?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긍정적인 표현으로 성령은 오직 참된 것, 옳은 것, 바른 것, 총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진리만을 말씀하신다는 의미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성령님은 거짓, 오류, 모순, 절반만 사실인 정보를 절대로 전달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이해에 한계가 있고 왜곡되기 쉬운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석하는 측면에서 오류나 잘못이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잘못이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진리만을 말씀하신다.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예언은 언제든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벧후 1:21).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도 오직 진리만을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바울의 편지 중 어려운 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벧후 3:15-16). 하지만 그럼에도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류가 없다.

이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다. 성령의 이차적 음성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서로 다른 말을 할 때, 우리는 어디에 더 권위를 두어야 할까? 조엘 비키는 <믿음의 확신을 누리는 삶>에서 신자가 확신을 얻는 두 가지 종류의 증거를 소개한다: 1) 은혜의 증거를 통해 얻는 확신, 2) 성령의 증거를 통해 얻는 확신.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해설하며 내린 결론으로,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전자는 성경을 읽고 확신을 얻는 것을 말한다면, 후자는 그때 성령이 특별히 주시는 경험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전자는 기록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음성을, 후자는 경험을 통한 성령의 음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비키는 두 가지를 구분하면서도 성령의 음성을 경험을 통하여 들을 때 주의할 점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반드시 말씀으로 점검받아라. 잘못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다. 3) 삶의 열매로 점검하라. 순종 없는 경험은 결국 반율법주의를 낳는다(좋은씨앗, 2023, 175-6pp).

먼저, 비키가 말한 성령 체험은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성령의 이차적 음성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가 경험한 것은 확신이 부족한 때, 한 목사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당신이 피할 길도 마련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을 통해 성령의 강력한 위로와 격려를 받은 일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성경 읽기를 통해, 들려진 말씀을 통해, 성도와 교제 가운데 성령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 비키가 말한 것처럼 말씀과 경험의 검증이 필요하다. 때로 우리 마음은 엉뚱한 것에 쉽게 감동받고,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가도 환난, 박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등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이차적 음성을 듣는 것의 심각한 폐해는 성경의 권위를 경시한다는 것이다. 성경으로 경험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성령께서 감동으로 쓰신 성경의 의미와 정반대의 경험을 했는데도,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 성령 하나님을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시는 분으로, 일관성 있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순덩어리로 제시한다. 성령님은 성경에 의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택하신 저자들을 통해 완벽하게 기록하도록 역사하신 분인데, 우리는 성경을 타로카드처럼 이용하여 자기 상황에 맞게 엉뚱한 내용의 계시로 해석하고 적용하면서도 그것이 성령이 성경을 통해 새롭게 들려주신 음성이라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쉽게 그리고 자주, 자기 경험을 앞세우며 성경의 권위에 대항하는 형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반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의 일그러짐도 없이 온전하게 나타내신다.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영원 무궁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고, 성경이 증언하는 아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후 4:6).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랑하는 성령 체험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초라하고,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조잡하고, 치사하고, 허풍이 가득하고, 고압적이고, 혹은 너무 무르고, 각양각색이다.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이라 그렇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자기 종들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나누신 대화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은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한 하나님은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과 매우 다르다. 가령 어떤 사람은 보너스를 받은 것까지 하나님께서 다 헌금하기를 바라셨는데, 자신이 그것을 거부했다가 그만 교통사고가 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다그치신 음성이었다고 말한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가? 성경이 하나님을 그런 모습으로 묘사하는가?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투자할 사업, 부동산, 만나야 할 사람을, 어떤 성도의 장래를 이야기해 주시면서 ‘너만 알고 있어’라고 하셨다고 한다. 한 제자의 미래가 궁금했던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예수님과 참 다른 모습이다(요 21:23).

성령 체험이 성경을 통해 성령이 증언하시는 하나님을 왜곡할 때, 우리는 그것을 성령님으로부터 온 음성이나 경험이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으로 모순되게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곡해의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의 본래 의미와 전혀 상관 없이 성경으로 성령의 음성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것의 문제다. 흔히 “말씀 받았다”라는 표현으로 주장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애용하는 하나님 음성 듣기 방법의 문제점을 이제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