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을 고치는 의사가 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연구와 훈련이 필요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국가고시를 통과한 뒤에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을 해야 전문의 자격을 딸 수 있다. 전문의 중에서도 명의라 불리는 의사가 있는데, 더 많은 연구와 훈련으로 실력을 갖추어 실전에서 그 소양과 실력이 입증된 사람을 말한다. 명의는 환자의 몸이라는 객관적 실체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진단하여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한 뒤 최적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에 능하다. 명의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여러 도구와 방법을 사용하는데, MRI나 CT 같은 정밀한 기계나 피검사, 소변검사 등과 같은 검증된 검사 방법이 요구된다. 그 어떤 명의도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추측에 의존하여 환자의 문제를 진단하지 않는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환자를 치료하려는 사람은 명의가 아니라 돌팔이다.
한 번 상상해보라. 당신이 지독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당신을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다. 입 안을 들여다보거나 손목의 맥박을 재지도 않고, 피검사나 X-레이, MRI, CT 등도 하지 않는다. 다만 쳐다보고만 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아, 알았습니다. 당신은 위암입니다. 오늘 당장 수술을 하겠습니다. 위의 일부를 제거하겠습니다. 항암치료는 수술 직후 제가 내키면 하고 그럴 마음이 안 생기면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장 그 병원에서 도망 나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도구는 말씀이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이 병든 자를 수없이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다!), 영혼이 병든 자를 낫게 하셨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눅 5:31-32). 죄인을 불러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사용하셨다. 말씀이 영혼을 살리고, 말씀이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벧전 1:23-2:3).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거듭나려면 죄인의 마음에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야 한다(벧전 1:23). 거듭난 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건강하게 자라려면 반드시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여 끊임없이 자기 몸에 채우는 것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영혼에 채워 넣어야 한다(벧전 2:2).
말씀이 영혼을 치유하는 방식은 ‘생각에서 시작하여 행동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행동은 그 행동을 낳는 생각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눅 6:44). 사람은 각각 그 마음에 쌓은 것을 행위로 낸다(눅 6:45). 그런데, 기록된 말씀, 하나님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먼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여 바로 잡는다. 계속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 교훈한다. 그리고 성경은 나아가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바르게 교정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행위로 우리 삶을 훈련한다. 결국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을 안팎으로 온전하게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히 건강한 상태, 생명력을 가지고 선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딤후 3:16-17). 그래서 사람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과 의술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말씀을 아는 지식과 그 말씀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한다. 명의에게 많은 소양과 실력이 요구되는 것과 달리, 성경을 다루는 이들에겐 성경을 아는 지식이나 그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문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명의라는 소리를 들어도 의사가 임의로 진단하고 감으로 치료하려고 하면 그 의사는 절대 신뢰할 수 없고 되도록 멀리해야 할 사람으로 취급되지만, 성경을 다루는 이가 객관적인 성경의 지식과 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를 버리고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고 활용하려고 할 때 이를 오히려 ‘신령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기록된 본문의 내부 문맥과(본문의 앞뒤 문장, 단락, 책, 성경 전체와 본문의 관계) 외부 문맥을(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 속에서의 본문) 고려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객관적인 방식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본문을 보고 심상에 떠오르는 직관적인 생각과 느낌을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주시는 고차원적인 말씀의 의미로 파악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전자의 성경 해석법을 문자적 성경해석 혹은 문법적-역사적(grammatico-historical) 성경 해석법이라 부르고, 후자의 성경 해석법을 일반적으로 영해(靈解)라고 부른다(한자 뜻을 풀어보면 ‘신령한 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알레고리, 추상적, 풍유적 성경 해석법이 여기 포함된다(성경에 알레고리와 추상적이고 풍유적 본문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문을 알레고리, 추상적-풍유적 해석법으로 풀이하는 것이 문제다). 후자를 더 나은 해석법으로 본다는 말은 곧 의사의 비유로 볼 때, 아무런 검진과 검사 없이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것을 더 나은 방법으로 본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성경은 영적인 책이기 때문에 일반 상식과 다른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굳게 믿는다. 오직 감만으로 환자를 고치려는 의사를 퇴출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영해는 성경을 대하는 방식에서 퇴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위와 같은 의사를 의사협회에서 괴짜지만 함께 의료에 힘쓰는 귀한 동역자로 보지 않고 환자와 의사 모두를 위해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경고한 뒤에 듣지 않을 경우 제명하는 것처럼, 영해를 일삼는 성경 교사나 설교자를 독특하고 이상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해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해를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로 사신 양무리의 건강을 해치도록 방조하는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사람과 그 행위를 구분하기 원한다. 나의 비판 대상은 ‘영해’이지 영해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무지하여 혹은 잘못된 자기 철학에 관한 헌신으로 영해를 고집할 수 있다. 영해에 관한 나의 비판은 사람과 그 행위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성격 탓에 영해 하는 사람의 평판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순전한 동기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형제자매라 부르시기를 기뻐하신 이들을 넘어뜨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려 하는 것이고,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끼치려는 것임을 주님께서 아실 것이다. 물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영해로 불쌍한 성도를 벗겨 먹는 거짓 교사들에겐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을 때 임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철저한 공의와 정의에 따라 임하기를 간구한다.
나는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영해가 결코 성령이 주시는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원한다. 신령한 해석이 아니라 이상한 영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제목도 성령이 아닌 ‘귀신’을 떠올리게 하는 “령해”라고 붙였다. 나는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주셨을 때, 어떤 면에서 이 성경을 신령한 책이라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원한다. 그리고 문법적-역사적 해석법을 사용하여 성경 본문의 의미를 찾을 때 어떤 면에서 성령께서 영적으로 역사하시는 지 밝히기 원한다. 또한 성경을 기록하시고 해석할 때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영해가 끼어들 수 없는 이유를 파악하고, 설교자가 자주 사용하는 영해의 종류와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원한다. 영해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신학적 실제적 해악을 고발하기 원한다. 결론적으로 이 칼럼 시리즈를 읽는 모든 설교자와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는 확신은 일반적인 글과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하나님께서 기록하셨고 그 방식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히 성령께서 우리를 건강하게 자라게 하신다는 확신이다. 더 고차원적이고 더 나은 방식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절망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 원한다.
가장 먼저 영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해보자. 그 전에 먼저, 영해를 즐기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 두 가지를 차례대로 검토해 보자: 1) “주께서 말씀하셨다”, 2) “이렇게 분별 됩니다.” 이 검토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영해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