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도우슨의 베스트셀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나온 홍성건, 김미진의 <왕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 기독교 안에서 큰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하고 선하신 뜻에 따라 사는 일에 있어서 지혜가 턱없이 부족하고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약하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닌가? 말씀이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길을 비추는 빛이 아닌가? 모든 성경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선을 행할 능력을 부족함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나 <왕의 음성>이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거나 성경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근본적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성경을 읽고 성령이 의도하신 의미를 밝히 알고 그 뜻을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우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24가지 방법을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여 1)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 2) 보는 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 3) 듣는 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 4) 영혼의 인지(awareness)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눈다. 홍성민, 김미진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을 이렇게 정리했다: 1) 말씀 묵상을 통해서, 2) 성령의 내적 증거와 음성을 통해서, 3) 성령의 외적 증거와 외적 음성을 통해서.

둘 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 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차적 음성, 성경 외적 음성에 귀 기울이라고 권한다. 성경을 보충(?)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적인 음성과 외적인 음성으로 나뉘는데, 내적 음성은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알려주시거나 들려주시는 것(영혼의 인지, 평안, 감동 등), 외적 음성은 성령이 그리스도인이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일어난 사건, 환경의 변화 등).

우리는 실제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귀로 들리는 음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내면에 울리는 음성으로 듣는 것,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직접 혹은 꿈에서 보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환경이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장면도 참 많다. 하지만 성경이 완성된 이후,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던 것이 그친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런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1. 분별의 문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들어보면 안다’라고 답하는 이들이 있다. 정말 들어보면 알까? 열왕기상 13장엔 벧엘에 살던 한 늙은 선지자의 사례가 나온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로보암 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그만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결국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왕상 13:18).

늙은 선지자의 말은 거짓이었다(“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악의가 있어서 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중에 사자가 먹지도 않고 지키고 있던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에 들어가서 슬피 울면서 장사를 지낸 것을 보면. 그런데 왜 거짓을 말했을까? 왜 여호와의 말씀을 천사가 음성으로(이르기를) 들려주셨다고 했을까? 그만큼 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요청대로 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렇게 강력한 욕구와 생각, 의지로 남을 속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속기도 쉽다. 자기의 생각인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지 구별하는 것은(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구체적 사안에 대하여)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다고 성경이 명백히 밝히지만, 선한 뜻을 품을 때, 내가 하는 것인지 성령이 주신 것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끄심 없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선한 생각을 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섭리로 다스리신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섭리가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셨을 때, 지금까지 겪은 많은 과정의 이유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영광을 돌릴 뿐이다.

만일 구별이 가능한 하나님의 직통 계시가 정말 주어진다면 어떨까? 실제로 위에 언급한 책들뿐만 아니라 많은 간증집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쉽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정하지만(가능성: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지금도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대화하듯 직통 계시로 말씀하신다고 한다면(현실: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순전히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뿐이라는 점에서, 다른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성경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음성을 체험한다는 사실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누구에게는 말씀하시고 누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왜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선택을 할 때도 음성으로 조언하시면서(‘오늘은 아이스커피를 먹어보렴’), 다른 신실한 성도가 매우 심각한 문제로 고민할 땐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에 차별이 있을까? 음성을 듣고 못 듣고는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까?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는 거라면, 얼마나 노력해야 특별한 계시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일까? 특별한 음성을 들으려면 그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배우고 훈련해야 들을 수 있는 계시를 열어두신 것일까?

2. 실천의 문제: 성경과 음성 중 무엇을 선호해야 할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경 외적인 이차적 음성 모두를 열어둔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무엇을 더 선호할 것인지의 문제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이 보낸 편지, 그리고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휴대전화 중에 무엇을 먼저 그리고 자주 찾겠는가? 지방교회의 창립자인 워치만 니의 신비주의적인 ‘하나님 음성 듣기’의 이단성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여기고, 영과 영의 직통 교감을 통해 더 고차원적인 계시를 선호한다는 데 있다. 현대판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는 성경 자체를 직접적으로 괄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을 ‘이용’하여 고차원적인 의미를, 성경의 본래 의미가 과연 그러한지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얻는 것에 집중한다. 결국엔 성경보다 성경 외적 계시를 우위에 두고 선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성경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또렷이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내적 음성 즉 마음의 울림, 감동, 떨림 등 미세하지만 인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실 때가 있다고 믿는다. 성경을 통해서는 보다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뜻을 알리신다면, 내적 음성을 통해서는(외적 음성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적용적인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신다고 본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구분은 하나님의 사람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다.

첫째,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과 감추어두신 뜻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내적 음성으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뜻은 분명히 나타내신 뜻이 아니라 감추어두신 뜻이다(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계시가 아니라 섭리의 영역이다. 미세한 힌트를 가지고 아무리 알려 해도 정확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계시로 확증될 때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신 나타내신 뜻에 순종하면서 사람은 동산의 모든 나무를 임의로 먹을 수 있었다. 내적 울림과 감동을 통해 오늘 반드시 먹어야 하는 실과를 찾아야만 했던 게 아니다.

둘째,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감추어두신 뜻을 추측하며 어떻게든 힌트를 얻기 위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된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살기보다 불안감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음성을 듣는 이들은 습관적으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을 때조차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이 정하신 답에 맞게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맞추기 무척 어려워진다. 뭔가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한 자기 책임이기 때문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갖고 후회한다. 하나님은 분명한 진리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당신의 뜻을 추측하며 거기 매여 살게 하시는 분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