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①자기를 사랑하며 ②돈을 사랑하며 ③자랑하며 ④교만하며 ⑤비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하지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모함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⑮배신하며 ⑯조급하며 ⑰자만하며 ⑱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ἄσπονδοι(아스폰도이)로 영어로는 “unforgiving”(NIV)으로 해석되었으며(“용서하지 않음”), 잘 알려진 헬라어 사전 BDAG에서는 “문제를 겪고 있는 타인과 해결책 협상하기를 꺼리는 사람’(“one who is unwilling to negotiate a solution to a problem involving a second party”)이라고 설명한다. 한 단어로 “화해할 수 없는”(“irreconcilable”)이라고 BDAG은 설명했는데, 한 마디로 마음속에 깊은 응어리를 간직하고 있는 상태가 실제로 문제를 겪는 상대방과 화목한 사이를 가져오는 데 큰 어려움이 되는 상태, 여간해서는 잘 용서가 안 돼서 관계 개선에 자주 문제를 겪고,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정서에 갇혀 화해를 위한 노력을 웬만해서는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말세를 살아가는 지금 이 문제가 더 심각한 이유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열매로 모두가 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개인에게 어떻게 생각하고 느껴야 할지 말할 권리는 없고, 반대로 개인이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느껴’라고 말할 때 그 권위를 모두가 존중해야 하는 시대라서, 타인이 나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아무도 알 수 없고, 그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화목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라’는 말은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된다. 개인의 감수성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시대, 그래서 말세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원통함을 풀지 않는 사람을 더 많이 발견한다.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은데, 개인주의가 운전대를 잡고 돌진하는 세대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줄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말세의 특징: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원통함을 풀지 않는 문제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포털사이트 사회면에 어떤 기사가 연일 올라오는지 보라. 뭔가 잘못한 사람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 관한 기사다. ‘하나만 잘못해 봐라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작정이라도 한 듯, 여러 언론사가 무섭게 물어뜯는 기사들이 가득하고, 각각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합당한 책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잘못한 사람을 완전히 쓰레기 취급한다. 기업을 운영한 사람은 기업이 망할 때까지, 사회적 명성을 가진 사람은 그 명성을 모두 다 잃을 때까지, 직장에서 내쫓기고, 가진 것을 몽땅 다 잃고,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해쳐도 좋다. 가족과 친구, 친척까지 다 파헤쳐서 반드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한다. 과거에 얼마나 선한 일을 했고, 사회에 기여했는지 여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분명히 잘못했으니, 원통함이 다 풀릴 때까지 실컷 두들겨 맞아야 마땅하고, 대꾸할 권리도 없다.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이 공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올바른 공의라고 할 때, 말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개인이 그 공의의 기준을 설정하여 잘못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통함이 다 사라질 때까지(만일 사라지지 않는다면, 끝없이) 잘못한 사람을 심판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 문제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여간해서는 용서하지 않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안 하고는 나의 절대적인 권한이고, 아직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당신도 똑같이 고통받아야 해’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이 화해를 시도할 때 그리고 화해가 이루어진 후에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이 생각나고 그때 받은 상처와 고통이 떠오를 때마다, 상대방은 또다시 가해자가 되고 죗값을 치러야 하는 범죄자가 된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용서” 혹은 “화해”를 현대인이 잃어버린 능력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왜 원통함을 풀어야 하는가?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은 원통함을 풀어야 하는가? 먼저, 앞서 말한 공의의 기준을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 10:30). 예수님은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실 때 위협하지 않으셨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 모든 사람의 행한 것을 선입견이나 오해 없이 낱낱이 보고 그 중심까지 판단하시며 아무에게도 그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직하고 완전하게 판단하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또 그 권한도 하나님께 있다. 옳고 그름을 법으로 제정하신 분 곧 입법자와 그 법대로 심판하시는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신다(약 4:12).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공의를 실현하려고 하거나 공의의 기준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공의와 정의를 온전히 세우실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 세상 사람 중에도 언젠가 공의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참고 견디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대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 공의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오래 참을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암 5:24).
그리스도인은 단지 원통함을 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화목을 도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5:9).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약 3:18). 또한 성경은 신자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요구한다(롬 12:18).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은 ‘마음에 내키면’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또한 ‘할 수 없으면 안 해도 된다’라는 말도 아니다. 화목은 적어도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개선인데, 한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한쪽이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할 의무가 있다(롬 12:17).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되(롬 12:19),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믿음으로 부르짖으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과 화해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예수님은 확신하며 약속하셨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원통함을 풀지 않는 죄에서 돌이키는 법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 자체가 충격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로 알려진 마태복음 18장의 가르침을 통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이 왜 죄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죄에서 돌이켜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는 주인과 그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나온다. 일만 달란트는 계산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현재 화폐로 환산하면 대략 몇 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주인은 그 종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독촉했고,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을때까지 참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놀라지 말라) 그 빚을 다 탕감해줬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용서받은 그날, 그가 보인 모습은 주인의 놀라운 은혜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몇 백만원) 빚진 친구의 목덜미를 잡고, 그가 엎드려 돈을 갚을테니 한 번만 참아달라고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끌고 옥에 가둬버린다. 불쌍히 여김을 받았지만 불쌍히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주인은 자신이 용서한 그 종을 불러다가 이렇게 호통쳤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3). 그리고 주님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왜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이 죄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모욕한 더러운 죄가 셀 수 없이 많고 주홍빛보다 더 검게 우리를 덮었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원통함을 풀어 우리를 용서하셨다. 주홍빛 같은 죄를 눈처럼 희게 덮으셨고,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사해주셨다.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주인이 몇 조에 달하는 재정 피해를 스스로 감수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죄를 탕감하는 대가로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값을 스스로 지불하셨다.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 정작 동료(혹은 원수)에게 원통함을 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받은 은혜를 싸구려 취급하는 것과 같다. 은혜를 베푸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받은 은혜는 주는 은혜로 이어져야 한다.
원통함을 풀지 않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화목을 도모하는 새사람을 입는 변화의 과정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은 은헤의 풍성함과 우리를 동정하신 주님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느끼고 경험하게 해주실 때 일어난다. 갈등을 겪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인터넷 기사의 주인공까지,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못하고 분을 쏟아내려는 잘못된 욕구가 솟구칠 때, 이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억제하고,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를 용서하고, 주께서 악을 선으로 갚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처럼, 누구에게나 선한 일을 도모하자. 모두가 좁은 마음으로 여간해서는 남을 용서하지 않고 원한을 마음 깊이 새겨넣어 도무지 닫힌 마음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각박한 이 시대,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경험한 자로서 넒은 마음으로 참된 용서가 무엇인지, 남을 불쌍히 여기고 적극적으로 화해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똑똑히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