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①자기를 사랑하며 ②돈을 사랑하며 ③자랑하며 ④교만하며 ⑤비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하지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모함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⑮배신하며 ⑯조급하며 ⑰자만하며 ⑱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우리는 지금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 속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 사람들이 어떻게 변질될 것인지 경고했던 말씀을 세분화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말세의 특징을 조명하고 있다. 이번엔 일곱 번째 말세의 특징인 “감사하지 아니”함에 관해 살펴보자.

말세의 특징: 감사하지 않는다

먼저, 오해하지 말자. 세상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 같이 감사할 줄 모르고 배은망덕한 것은 아니다(오히려, 자칭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보다 현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비해 우리는 정말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의학 정보와 기술의 발달로 더욱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게 됐다. ‘식사는 하셨습니까?’가 인사였던 시대가 있었는데, 이제는 옛날 왕들이 먹을법한 푸짐한 식탁을 언제든 주문할 수 있다. 걸어서 몇 달을 가야 할 거리를 몇 시간 안에 이동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는 용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한두 벌의 의복이 이제 패션 아이템으로 옷장에 가득 차 있다. 발전된 정치 형태는 모든 국민에게(완벽하진 않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제공한다. 확실히 우리는 과거에 비하여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이는 감사할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말세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는 현상을 더 많이 발견한다. 왜 그럴까?

솔로몬은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사람은 자신에게 새롭게 주어진 혜택과 번영에 그 즉시 기뻐할 수 있고 생각보다 오래 감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솔로몬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사람의 눈과 귀는 금세 적응한다. 만족감을 얻어 행복했던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된다. 한때 자신을 채워 준다고 생각한 그것이 이제는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결국 감사하지 않는 것의 문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 문제다. 배고픈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계속 음식을 찾는 것처럼, 불만족스러운 사람은 만족을 얻기까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는다.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해지는데,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불만족을 낳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 불량식품을 먹으면 헛배 부르고 더욱 허기진 것처럼, 참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닌 세상의 것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려 하는 행위는 영혼의 갈급함과 목마름을 더 증폭시킨다.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감사하지 않는 현상의 원인이고, 궁극적인 만족이 주어지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증상은 더 심해진다.

분명히 말하지만, 세상 사람이라고 해서 감사할 줄 모르거나 모든 일에 기뻐하지 않거나 전혀 만족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길 때, 혹은 안 좋은 일을 가까스로 피해 갈 때, 감사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인 사람도 종종 발견한다. 불교처럼 동양 종교를 제대로 믿는 사람 중에서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내면의 평안과 감사의 마음을 훈련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종교적으로 감사 훈련을 완성하여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닌가? 그는 또 이렇게 권면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여느 종교인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정신 승리를 거둔 것일까? 아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밝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세상은 이 비결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없고 그래서 감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고백을 한 바울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비결을 알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있고 그래서 감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왜 감사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참된 만족을 얻은 자들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금세 만족감이 사라지는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만족을 주는 대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바울이 벅찬 기쁨과 만족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명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고 그분의 능력이 지극히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모든 일에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었고,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 교부 어거스틴은 “우리는 오로지 주님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나니,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을 모릅니다”라고 고백했다. ‘평안’을 ‘만족’(또는 ‘감사’)로 바꿔도 무관하다.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계속해서 무언가로 채우려고 애쓰던 영혼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안에서 그 피곤한 수고를 그치고 쉼을 누리게 된다. 그분 안에서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만족을 누린다.

하나님께 모든 지혜와 힘과 부와 존귀가 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그분으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약 1:17).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자도 전부를 가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을 다 소유하신다(시 24:1).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고, 주권자로서 그 뜻대로 그(것)들을 다루실 수 있으며, 아버지로서 그(것)들을 돌보시고, 심판주로서 그 기준대로 치리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모든 신성과 능력이 가득한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호기심을 줄 수는 있어도 만족을 주지는 않는다. 만족은 우리가 그 존재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주어진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그 관계를 설명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제 그분이 직접 설명하신 대로, 그/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그/그녀 안에 거하는, 친밀하고 변함없고 영원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얻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수 있다. 우리 영혼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영광스럽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분이 우리에게 변함없는 은혜와 사랑과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그리스도가 주시는 ‘무엇’도 감사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이 우리와 영원한 사귐을 가지시는 것 때문에 감사하다. 또한 우리가 그분 안에 믿음으로 거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주신 놀라운 복음의 은혜와 능력과 가치를 생각할 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8).

감사하지 않는 죄에서 돌이키는 법

세상엔 감사하기 힘든 일이 무척 많다.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는 질병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믿었던 이로부터의 배신, 경제적 파산, 관계가 찢어지는 아픔 등 헤아리기 힘든 슬픔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변하지 않는 감사 제목을 가지고 있고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지만,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이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하기 힘든 일 자체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든, 죄 때문에 겪는 일이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아래 주어진다. 신자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유익할 것 하나 없다고 여겨지는 십자가를 통하여 택하신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가장 선하고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통하여 반드시 선하고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죄에서 돌이키는 법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이로써 우리도 듣는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9-12)

첫째, 하나님의 뜻을 알고, 둘째, 그 뜻대로 기쁨으로 행하여, 셋째, 더욱 친밀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인내하면, 넷째,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지 않는 자에게서 이 건강한 순환에 일어난 장애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순종할 기분이 아니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진다. 닥치는 일을 할 뿐 참거나 소망을 바라지 않는다. 당연히 감사가 사라진다. 감사하기 힘들 때,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서 돌이키려 할 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바울의 기도를 배워야 한다. 주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우리를 채우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고,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달라고 구하고,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기쁨으로 능력과 힘으로 견디고 참게 해달라고 구하고,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영생의 관점에서 우리가 얻을 기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지 알게 하셔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이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