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가르침 중에서 시대착오적 가르침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중에 가장 거센 시대정신의 저항을 받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신자끼리 결혼하도록 권면하는 가르침이다. 요즘엔 결혼, 이혼, 재혼 등을 오롯이 개인의 선택 문제로 본다. 그래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으로 보고 동성끼리 결혼하거나 여러 가지 사소한 이유로 이혼하더라도 순전히 개인의 자유이며 그 책임도 개인이 진다고 본다(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데 신자가 반드시 신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니 얼마나 무례한가 또 얼마나 대단한 월권인가? 개인이 누구와 결혼(재혼)할지 또는 이혼할지 이러쿵저러쿵할 권리가 교회에게 있는가? 두 사람이 서로 좋아서 서로에게 신실하게 사랑을 주겠다고 맹세하는 결혼은 꼭 교회가 아니더라도 인류애 관점에서 볼 때,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지만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다(물론 신자가 아닌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따르기로 결단한 자들이 바로 신자다(마 16:24). 신자는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다(갈 2:20). 삶의 일부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렇게 한다(고전 10:31). ‘무엇을 마실까?’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적용된다면, ‘누구와 결혼할까?’와 같은 평생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일은 당연히 예외가 될 수 없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권위를 행사하는데, 오직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목사나 장로 등 직분자 개인의 뜻이 혹은 공동체의 합의된 뜻이 아니라) 신자에게 선을 권하고 악에서 돌이키도록 권위를 주셨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는 진리의 말씀대로 판단하고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는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라고 명하신 말씀에 따라 회복을 목적으로 징계해야 한다(고전 5:13).

그러므로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끼리 결혼하는 것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든 상관없이 자기 행복을 위해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신자인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자라면(롬 14:8), 주님의 뜻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성경이 금하고 있다는 것을 대략 알고는 있지만, 꼭 그렇게 다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경대로 살면 좋겠지만, 어차피 다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나요?’ 혹시 이런 마음으로 자신에게 정상참작을 하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참된 신자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참된 신자는 주님의 뜻을 벗어난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과 주변 사람을 대적하는 악한 일이라는 것에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갖는다.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여 죄가 일으킨 결과를 바로잡기 위해 겸손히 낮아진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

자, 그러면 올바른 질문에 답을 찾아보자. 하나님은 신자끼리 결혼하는 것을 기뻐하시는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명령된 내용과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원리를 함께 살펴보겠다.

 1. 직접적인 명령: “주 안에서만 (결혼) 할 것이니라”(고전 7:39)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쓴 결혼 관련 문제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결혼, 이혼, 재혼, 독신 등 개인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일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순종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답했다. 그리고 과부가 되어 재혼하는 여성들에게 “주 안에서만 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주 안에서만”이라는 말은 NIV 성경에서 “he must belong to the Lord”로 번역됐는데, 이는 과부의 재혼 상대가 반드시 ‘주님께 속한 자’ 곧 신자여야 함을 말한다. 이 명령은 또한 과부가 재혼할 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모든 결혼에 적용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원칙은 앞서 이혼을 말할 때도 똑같이 나타나는데, 바울은 다소 충격적이게도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혼을 원할 때, “갈리게 하라” 곧 이혼하라고 권면했다(고전 7:15).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철옹성같은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처럼 들린다(막 10:9). 하지만 예수님도 “음행”을 예외로 두셨다(마 19:9). 음행은 그 행위 자체로 이미 부부의 관계를 끊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우 이례적으로 배우자가 불신자이고 그/그녀가 이혼을 원할 경우 이혼이 허용된다. 이는 무슨 뜻일까?

배우자가 불신자면 신자쪽에서 언제든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이혼을 원하는 쪽은 불신자다. 신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 것을 원할 경우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전 7:12-13).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 배우자가 남편/아내를 버리려고 할 때, 신자는 그렇게 버림받을 수 있다. 바울은 그렇게 되는 일에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했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보통 배우자가 죽어야만 구속받는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고전 7:39). 하지만 믿지 않는 배우자가 원치 않을 때, 신자는 그 결혼 관게에서도 죄책감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만큼 불신자와 신자의 결혼 관계는 정상적이지 않고 조화롭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래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라고 명령한다(고후 6:14). 이것이 얼마나 조화롭지 못한 관계인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데, 빛과 어둠, 의와 불법,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서로 사귀고 함께 하고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행위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사례를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자기 백성에게 같은 이유로 이방 민족과 결혼하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했고, 그 결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갑자기(사실상 오래 참고 인내하신 끝에)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불러 모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매우 충격적이다. 에스라의 리더십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죄인 통혼의 죄를 뉘우치고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내쫓기로 결단했다(스 10장). 그들은 심지어 통혼한 자들의 명단까지 성경에 박제해 놓았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구약의 사례는 오늘날 교회에게 적용되는 지점이 상당히 많다. 먼저, 둘 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거룩하게 하나님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도록 구별하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잠재적인 심판 아래 있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경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둘의 조합을 엄격히 반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되는 일에 평생에 걸쳐 방해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같은 민족 안에서만 결혼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니었다. 노예로 삼은 이방 민족 등 다른 민족과 결혼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이 금하신 이유가 사라진 경우 즉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안으로 들어올 경우만 가능했다. 불신자가 신자로 거듭난 경우 그/그녀와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죄는 그 영향력에 있어서 막중한 죄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반역 행위이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것의 결과는 본인과 배우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족(결혼이 그런 관계를 맺기 때문에), 친척과 친척, 친구와 교회 안 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배우자나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고, 부부가 낳고 기를 자녀와 그 손자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어떤 죄보다도 막대하다.


‘신자끼리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이유를 성경의 다른 가르침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우려되는 먼저 몇 가지 반응에 짧게 답하기 원한다. 첫째, 그러면 불신자와 결혼한 죄는 평생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죄는 그 결과를 맛보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긴 시간 동안 삶의 여러 방면에서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맛보기는 한다(가령 믿지 않는 배우자가 영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주님께로 나를 인도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울 수는 없다). 하지만, 신자는 자백을 통해 용서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실수나 죄까지도 모두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신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미움받는 가정으로 낙인을 찍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둘째, 어쨌든 신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면, 불신자와 결혼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로마서 6장의 질문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답도 같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 성경을 통해 분명한 기준을 알았고, 그렇다면 그 기준에 우리의 기준을 맞춰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고 미워하시는 것을 멀리하는 것이 정상이다. ‘인성 나쁜 신자보다 인성 좋은 불신자가 오히려 낫다’ ‘믿지 않는 것 빼고는 완벽한 신랑/신붓감이다’ ‘너무 많은 정을 주고 깊은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뭐가 맞는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등등의 핑계로 자신을 속이며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합리화하려 애쓰지만, 결국엔 반역하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불평이고, 어쨌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겠다는 발악이다. 신자는 ‘주여 주여’라고 입술로 고백만 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는 자다. 그러면 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손히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신자의 합당한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