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행 2:40),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롬 12:2). 이 명령은 구원받은 자들도 이 세대를 본받아 패역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대로 사는 것에 무기력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포함한다. 이 세대에 섞여 그들과 똑같은 방식과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풍조를 일으키는 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이며, 거짓의 아비 마귀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말세를 무섭게 이끌어 가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①자기를 사랑하며 ②돈을 사랑하며 ③자랑하며 ④교만하며 ⑤비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하지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모함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⑮배신하며 ⑯조급하며 ⑰자만하며 ⑱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말세의 특징 04: 교만하다
말세의 특징 그 네 번째는 바로 교만이다. 바울이 “교만”을 말할 때 사용한 헬라어 단어(후페레이파노스)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흩으시고(눅 1:51), 미워하시며(롬 1:30), 물리치시고(약 4:6), 대적하시는 대상(벧전 5:5)으로 언급되었다. “교만”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높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시 101:5,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마음을 품기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죄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죄다.
사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들이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건전하고 선량하게 사는 사람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는 “교만”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또한 근본적인 문제를 일으켜 얼마나 심각한 파국을 일으키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전 인류를 타락으로 몰아넣고 죄와 허물로 하나님과 단절된 채 헛된 인생으로 낭비하게 만든 아담과 하와의 처음 죄는 바로 교만이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아주 단순한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두신 위치와 순종의 자리였지만, 사람은 뱀이 유혹하는 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까지 자신을 높이고 싶었다(“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선량하고 선하고 건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 큰 대역죄인이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등 여러 가지 죄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죄 곧 하나님의 주권과 그 앞에서 자기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의 결과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그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을 때 모든 불의가 삶에 열매 맺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악인의 말이며 그는 교만한 얼굴로 그 말을 한다(시 10:4). 모든 사람의 본분 곧 그의 마땅한 자리와 의무가 있으니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 이에 대한 강력한 거부반응이 교만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프레임은 서양 철학의 역사를 다루며 인류가 얼마나 빠르게 하나님을 부정하며 자기 이성의 자율성을 추구해 왔는지 설명한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그 모든 생각에 하나님을 부정하며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해지는지 우리는 현실 속에서 자주 목격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마 23:12; 눅 18:14). 하지만 말세에 자기를 낮추는 자를 찾기는 정말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겸손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의 왕이시다. 그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겸손히 낮추셨다. 심지어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셨다. 가장 위대한 그 겸손이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이다(빌 2). 예수님은 교만한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올 복음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파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서 묻고 따지는 사람은 결코 회개의 자리까지 내려갈 수 없다. 회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을 그 창조주와 주권자 앞에 두어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잘못된 생각을 품고 반역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회개를 거쳐 그리스도께서 겸손으로 가져온 의를 옷 입게 되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자기를 낮추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눅 18:14).
선지자 에스겔은 그리스도인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회개에 이른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돌 같은 마음은 교만한 마음이다(“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 롬 2:5). 그 마음을 살처럼 부드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신다(딤후 2:25).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벧후 3:9), 교만한 자에게 회개함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진리대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그리스도인을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특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강력한 은혜의 열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대로 자기 열심으로 노력과 헌신으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신 겸손의 옷 그 의로운 옷으로 옷 입혀졌기 때문에 회개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리를 인식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교만한 그리스도인은 없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히 낮추신 사랑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교만에서 돌아서는 법
하지만 교만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고질병처럼 신자를 괴롭힌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권면한 것처럼(롬 12:3), 신자는 수시로 옛사람의 욕구에 따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이 정하신 뜻을 넘어 자기 욕구와 의지와 생각을 주장하려 한다. 대표적으로 신자의 삶에 교만이 드러나는 경우는 원망이나 불평, 불만족 할 때이다. 왜 원망하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왜 불평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신 사랑을 의심하며 이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불만족 하는가? 옛 언약의 백성이 파와 양파와 마늘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기웃거린 것처럼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만족을 극대화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열심히 찾는다. 하나님이든 돈이든 쾌락이든 다른 어떤 우상이든 상관없이.
그래서 성경은 신자에게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명령한다(벧전 5: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그리스도인은 말세에 팽배한 교만이라는 죄와 맞서 싸우기 위해 더욱더 힘써 겸손을 추구해야 한다. 교만은 언제든 신실한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 고개를 쳐든다. 복음의 동역자들끼리 교만하게 다툴 때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묵상하게 했다.
마귀가 세상에 일으킨 교만의 풍조가 매섭게 우리 영혼을 위협할 때 우리는 겸손의 끝판왕 예수님께 피해야 한다. 그분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아무리 작은 교만이라도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품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있는 것 중 그분께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 중에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어 얻게 된 것 역시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히 누리게 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모두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하늘 보좌에서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겸손으로 나타난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분께 교만이라는 반역의 깃발을 들어 올릴 수 있겠는가?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 교만을 아름다운 덕목으로 치켜세우는 오늘날, 겸손한 자가 아니라 자신만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을 위인처럼 떠받드는 말세에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많은 세상 사람이 주목하고 칭찬하고 따르는 이가 있을지라도 교만으로 완전히 망하게 된 세상에 구원의 소식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한다. 그분만이 우리를 교만에서 돌이켜 겸손의 길로 걷게 하실 수 있다. 그분을 따르면 우리는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다. 그분이 품으신 마음을 우리가 품으면 우리는 가족과 교회, 세상 가운데 갈등과 전쟁을 일으키는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히 서로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낮은 자리에서 종처럼 겸손히 섬길 수 있다.
중요한 건 최종 평가가 아닌가? 주님의 날 그 마지막에 그분은 자신을 낮춘 자 곧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이다. 자기를 높인 자는 그분께서 직접 낮추실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에서 돌아서기 위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라. 주께서 반드시 높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