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①자기를 사랑하며 ②돈을 사랑하며 ③자랑하며 ④교만하며 ⑤비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하지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모함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⑮배신하며 ⑯조급하며 ⑰자만하며 ⑱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바울이 경고한 고통하는 말세의 때는 이미 이르러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의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갈수록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고,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는 악한 세대로 변해가고 있는 세상을 목격하고 있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명령한다(롬 12:2). 그러면 점점 거룩함에서 멀어지는 이 세대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하자.

말세의 특징: 거룩하지 않다

‘거룩하지 않은’(ἀνόσιος)은 ‘거룩한’의 의미를 갖는 ὅσιος에 부정형 접두사 ἀν이 결합한 형태로, 영어에서는 ‘anti’ 등이 붙어서 서로 완전히 상반된 무언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쓰였다(예: Christ – Anti-Christ). 결국, ‘거룩하지 않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개념과 정반대 쪽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결국 ‘거룩’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거룩’이라는 단어는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특별히 구별되고 지켜지는 것 등을 뜻한다. 이렇게 광범위한 개념으로 접근하면 사실 바울이 경고한 말세의 고통하는 때 벌어지는 대부분의 현상이 ‘거룩하지 않은’ 것이다. 가령 비방, 부모 거역, 무정, 모함, 무절제, 배신, 조급, 자만 등은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보통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기독교의 ‘거룩’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속성에 맞는 거룩을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가르치셨다(마 5:48).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 쾌락을 사랑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왜 거룩하지 않은 것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면, 이제는 문제가 된다.

어떤 면에서 이 세대가 거룩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 백성이 아니면 굳이 그분의 속성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만물의 창조주시라면(그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실제로 매 순간 그분의 공급과 보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분의 통치 밖의 영역은 없고, 통치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그분의 백성이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 사실을 기쁨으로 인정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함께 그분의 창조와 통치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거부하며 끝까지 반역하는 것뿐이다. 제자리에서 이탈한 이 세대는 결국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기 백성의 정체성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점점 더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분의 기준을 미워하며 거기서 해방되는 것을 참된 자유이자 자아실현이라고 포장한다. 셀수 없이 많은 아기가 매년 살생 되고 소위 ‘성 혁명’이 성 정체성의 대혼란을 일으켜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피해를 주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의 ‘거룩’에서 벗어나려 하는 강력한 욕구, ‘거룩하지 않은’ 부패한 본성에 기인한다. 바로 여기서 시작된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한 현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왜 거룩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의 흐름과 정반대로 가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인을 원래 자리로 돌려 놓았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다시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별하여 택한 자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부른다(벧전 2:9).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 부른다(고전 1:2).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라 불리고, 실제로 거룩하여졌으며, 계혹해서 거룩한 존재로 빚어진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자녀라면 거룩하신 아버지의 속성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 주여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참 제자이다. 아버지의 뜻은 거룩함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와 선생으로서 따라올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다. 참 제자라면 그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셋째, 그들은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그들의 몸이라고 말한다(고전 6:19). 성스럽게 여겨지는 장소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을 삼간다. 성스러운 분이 항상 함께하신다면, 당연히 말과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거룩’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J. C. 라일의 <거룩>을 읽어보라). 분량상 ‘거룩하라’는 명령을 잊어버리지 않고 상기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거룩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 하나만 더 제시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을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히 10:1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여 드리심으로, 하나님으로서 절대 받지 말아야 할 수치와 조롱과 질고와 고통을 당하시면서 믿는 자에게 선물하신 것이 ‘거룩함’이라면 그것을 힘써 지키는 것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것이 아닌가!

거룩하지 않는 죄에서 돌이키는 법

뛰어난 성경학자인 윌리암 맥도날드는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이 고발하듯, ‘거룩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잊혀진 것만 같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부흥, 개인의 영성 계발, 그리스도인의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데, 사실상 거룩을 잊은 부흥, 계발, 개혁은 그 자체로 아무 유익이 없고 오히려 냄새나는 오물, 시끄러운 소음만 만들어낼 뿐이다. 생각해 보라. 교회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가는데, 그 안에 죄가 가득하다면 어떻겠는가? 영성과 인격의 괴리감이 점점 커진다면? 사회에 많은 유익을 끼치는 자들이 온갖 도덕적 결함을 보인다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 정체성을 주신 하나님이 요구하신 삶이 바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밝혔다(벧전 2:9).

먼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어떤 부르심을 받았고, 또 어떻게 그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그분 안에서 얻은 모든 복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라는 요청이다. 거룩함을 되찾는 길은 단순히 무엇을 하면 괜찮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철저히 알고 지키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다. 마음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하지 않은’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강력한 것처럼, ‘거룩한’ 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을 사모하고 그 안에 거하고 싶은 욕구가 커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고 싶어 하고 또 그 사람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려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 곧 거룩하지 않은 죄에서 돌이키는 길이다. 특별히 당신을 거룩하지 않게 만드는 죄와 그 죄를 범하게 만드는 사람, 환경, 상황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곳에서 벗어나라. 바로 그 죄가 당신이 사랑하는 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이유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죄를 일으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라.

결국 거룩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요셉과 같은 마음을 상실한 사람이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 여인과 단둘이 있는 상황, 자신을 유혹하는 환경에서도 요셉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했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 앞에서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베푸신 은택을 기억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그 무엇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분의 손길에 따라 점점 더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닮아가고, 거룩하신 우리 주님을 따르며, 거룩하신 우리 성령님과 동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