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①자기를 사랑하며 ②돈을 사랑하며 ③자랑하며 ④교만하며 ⑤비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하지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모함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⑮배신하며 ⑯조급하며 ⑰자만하며 ⑱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무정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따뜻한 정이 없이 쌀쌀맞고 인정이 없다” 또는 “남의 사정에 아랑곳없다”이다. 영어로는 “no love”(NIV)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사랑이 없는’ 모습 그러니까 따뜻한 정이 없고 쌀쌀맞고 인정이 없는 태도나 말, 행동이 상대방의 사정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스토르고스(ἄστοργος)인데, 로마서 1장 31절에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을 때, 그들 삶에서 나타난 “합당하지 못한 일”“무자비한” 모습과 함께 동반된 특징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무정한 것의 뿌리는 하나님께 무정한 것, 하나님께 그 마음을 두지 않는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정이 넘치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인정이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쌀쌀맞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단순히 ‘성향’의 차이가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으로 판별할 수 있는 문제가 되는 것이 맞을까? 바울은 분명히 본문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특징 중 하나로 “무정하”다는 것을 꼽았고, 이는 교만, 비방, 무절제 등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고 악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러한 성품(그리고 사람)에게서 돌아서야 한다고 권면했다.

말세의 특징: 무정하다

대중매체가 그려내는 과거의 삶에서 우리는 현재와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정감 넘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서리’가 도둑질이 아니라 배고픈 자에게 베푸는 주인의 따뜻한 배려였고, 일부러 반찬을 넉넉하게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문화가 있었다. 잘 모르는 사이라도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을 만나면 인사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한 노약자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때가 있었다. 과거는 무조건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였고 지금은 정을 찾아볼 수도 없는 척박한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본문이 예측한 것처럼 말세가 깊어지면서(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가까이 올수록) 인간 세상은 점점 더 무정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아니다. 세상도 각박해지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러면 왜 무정한 것이 문제가 될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사랑’이 많은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 표현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무정하다’의 의미에서 접근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타적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자존하시고 자족하시는 분이시다. 스스로 계시면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시고, 아무에게도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수많은 만물을 보고 있다(우리도 그들 중 하나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고, 그 동기는 바로 “사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 안에 존재하는 친밀하고 적극적이고 이타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은 너무 크고 풍성하여 창조된 만물에게도 흘러넘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공의와 거룩과 인자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따뜻한 정을 나눠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다(창 1:26-31). 사람은 오로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만물을 철저히 이용만 하는,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인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고(창 1:26),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 “땅을 정복하”라고 요구하셨다(창 1:28).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따뜻한 정을 인류 나아가 만물과 나눠야 했다. 바로 여기서 기본적인 인류애를 발견할 수 있고, 환경과 자연을 아끼고 돌봐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갈수록 인심이 나빠지는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과 세상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악하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해야 할 인류에게서 하나님의 이타적인 사랑이 사라지는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이는 인류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순기능을 잃었다는 증거이고, 그 증상이 갈수록 심각해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리스도인은 왜 동정해야 하는가?

그냥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모두가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종종 이슈가 되는 영상 속 주인공들처럼 인심 좋은 이웃의 모습을 실천하고, 그렇게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바꿔가면 되지 않을까? 고장난 시계에 새로운 건전지를 넣는다고 고쳐지지 않는 것처럼, 고장난 인심은 뜨거운 열정과 노력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그것을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든 인정 많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될 뿐이다. 본문이 말하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특징은 복합적이고 본질적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무정”한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보다 쾌락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무정”한 것을 촉발한다. 요컨대 하나님보다 자기를(또한 쾌락과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이타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무정한 세상에 섞여 인심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정한 세상에서 따뜻한 인정을 나타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본질적인 문제가 고쳐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아래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이고 교만한 영혼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웃에게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주시는 열정적인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불신자가 자기 힘으로 인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다. 요컨대, 하나님의 따뜻한 정을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맛보는 자만이 이웃에게 기쁨으로 정을 나눠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완벽한 본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마치기까지 신실하게 일에 몰두하셨지만,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둘러싼 무리를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단지 과업만 끝내고 승천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섬기려는 자세를 가지셨고(마 20:28),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이타적으로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마 9:36). 단순히 안타깝게 여기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그들의 고생과 필요를 보시고 그 결핍된 것을 온전히 채워주기 원하셨다. 주님은 또한 큰 무리에 섞여 있는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마 14:14). 귀신 들린 자를 불쌍히 여겨 치료하시고(마 15:22), 사흘간 굶은 무리를 불쌍히 여겨 그들의 배를 양식으로 채우셨다(마 15:32). 주님은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한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고, 죄의 저주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운명을 비통히 여기셨다(요 11:33).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딱한 사정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기 원하셨으며,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적극적으로 그 필요를 채워주시기 원하셨다. 바로 주님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본이 되신다.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내세울 권리를 찾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가 가신 길을 뒤따른다면, 무정한 이 세대를 거꾸로 거슬러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동정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정한 죄에서 돌이키는 법

먼저, 무정한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서 멀어진 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원래부터 무뚝뚝하고 정이 없고 쌀쌀맞은 성격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을 고수할 이유도 없다. 물론, 성격과 성향의 차이도 있고, 상대적으로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필요를 돌보신다면, 나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에게 가두어두고 썩히는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은혜는 나를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이 얼마나 따뜻하게 나에게 정을 베풀어주시는지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육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 필요까지도 항상 살피시고 채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139:17). 매 순간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나를 돌보시는지 묵상해 보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따뜻하게 무리를 돌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섬기셨는지 생각하면서 그분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을 빚어가는 틀이 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대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라.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당신의 타고난 성향과 욕구가 방해된다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라.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부터 성도, 이웃에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사랑을 베풀라.

세상과 교회는 가는 방향이 다르다. 세상은 점점 무정해지지만, 교회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인정을 베푼다. 교회는 하나님의 따뜻한 정을 항상 경험하는 이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인정을 많이 베푸는 편이다. 서로를 섬기고, 대접하고, 필요를 채우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교회는 갈수록 고통스러워지는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말과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흩어진 교회는 각자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의 따뜻한 빛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 따뜻한 온기로 하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영혼들을 기이한 그분의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