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갈수록 좋아질 것이란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기술은 발전할 것이고 삶은 점점 편리해질 것이나 사람 밖에 있는 요인이 아니라 사람 안에 강력하게 뿌리내린 죄성 때문에 미래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악은 분명 존재할 뿐 아니라 세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말세를 “고통하는 때”라고 부른다(딤후 3:1). 참고로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날부터 다시 오실 날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말세가 고통하는 때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기 때문이다(눅 11:29).

사도 바울은 악한 세대의 19가지 특징을 디모데에게 설명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①자기를 사랑하며 ②돈을 사랑하며 ③자랑하며 ④교만하며 ⑤비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하지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모함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⑮배신하며 ⑯조급하며 ⑰자만하며 ⑱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본문에서 명령어는 딱 두 가지이다. 첫째, “알라”(1절). 둘째, “돌아서라”(5절). 디모데를 비롯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이 악한 세대의 특징을 모르고 있으면 안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대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 악한 세대에게서 돌아서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이 악한 사람처럼 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고전 5:12-13). 악한 세대에 물들지 않고 악한 세대의 누룩이 퍼지지 않도록 순전하고 진실한 삶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의 19가지 특징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원한다. 악한 세대의 특징을 바로 알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교회가 이 세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악한 누룩이 교회 곳곳에 퍼져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 가운데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병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이 세상이 교회를 염려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런데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여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인 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계 3:14-22).

예수님은 그런 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경고하셨다(계 3:16).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악한 세대의 특징을 제대로 알고 그것이 우리 삶에 퍼져있지 않은 지 점검해봐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는 자는 어둠에 행할 수 없고(요일 1:6),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악한 세대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말세에 만연한 특징을 거스르기 위해 계속해서 힘써야 한다.

말세의 특징 01: 자기를 사랑한다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알라고 명한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기를 사랑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현대 철학과 심리학은 인간의 문제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TV나 베스트셀러에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말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라’이다. 그런데 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말세의 특징으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다. 인류를 타락에 빠지게 한 죄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의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기 사랑’이었다.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죄인이 되고 처음으로 상대방의 유익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죄에 대한 책임 전가를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그들에게 복 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신 법은 정확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마 22:37-40). 그런데 잘 살펴보라. 하나님을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힘과 내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 모두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사랑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말세에 만연한 사상은 개인주의이고, 그 특징은 지독한 자기 중심성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기본적인 성 정체성도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쉽게 부정하고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 해도 자기만 좋으면 괜찮다고 말한다. 심지어 다수가 자신의 관점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배우자와 자녀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불륜을 저질러도 죄가 아니다. 자기감정과 만족이 최고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 복잡한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어떠한가? 산모의 권리라고 말하든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든 결국은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건강하다. 사랑은 그 본질상 이타성을 갖는다(이타성: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성질’).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전 13:5). 하지만 세상이 말하고 권하는 ‘자기 사랑’은 절대로 이타적이지 않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나만 좋다면, 나만 만족하면, 내 기분이 좋아진다면, 나에게 쾌락을 준다면, 나에게 유익을 준다면, 나에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허락한다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것이 말세에 나타나는 ‘자기를 사랑하는’ 특징이다.

교회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교회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 반드시 돌아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따를 것”을 요구하셨다(마 16:24). 또한 예수님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4:26). 철저한 이타성, 그것도 그리스도의 이익과 영광을 최고로 꾀하는 성질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웃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은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편지한 내용에서 발견된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종은 자기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이타적인 사랑은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를 향한 이타적인 사랑으로 나타난다(벧전 1:22).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랑 방식이다(빌 2:3-4).

한 마디로 구원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하는 죄인을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악한 세대는 이런 삶이 자기 행복을 모두 포기하고 남의 유익과 기대와 요구에 따라 종처럼 살아가는 억울하고 불쌍한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런 삶이야말로 이기적인 자기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뻗어가는 참된 자기 사랑이라고 말한다.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 자기만 아는 유아의 특징을 버리고 남을 배려하고 함께 공존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또한 죄인의 자기 중심성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이웃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와 함께 사랑으로 공존하는 삶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신다.

안타깝게도 그 과정 중에서 과거 자기중심적인 특징 곧 죄인의 특징을 답습하거나 말세의 악한 세대 특징에 물든 성도가 있다. 그런 성도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즐긴다. 자신 혹은 자기 가족만 교회 서비스를 즐기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형제자매의 안부에 관심도 없고 그들의 삶에 들어가 사랑을 전달할 마음도 없다. 배우자나 성도와의 갈등 중에 끝까지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고 자기의 잘못을 먼저 돌아보지 않는다. 항상 자기가 받은 상처나 인정받지 못한 권리에 집중하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신앙의 연수나 교회에서 맡은 직분, 헌신도와 상관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특징이 강력하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중심성에서 구원받은 적 없는 악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말세의 고통하는 특징이 도진 병든 그리스도인이다(만일 그가 구원받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그렇다면 확실히!).

자기 사랑에서 돌아서는 방법
물론 신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옛 자아가 했던 방식대로 자기를 사랑하는 특징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세대의 특징인 자기 사랑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자기 중심성을 죽이고 이타성을 키울 수 있을까? 자기만 아는 영적 어린아이에서 친구를 더 낫게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실천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이며 강력한 것은 우리가 주로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고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심으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사랑을 베푸셨다(요 15: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빌 2:5-11). 어떻게든 나머지 제자보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 했던 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버지의 영광을 최고로 원하시고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이타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이께서 요구하신 새 계명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이 아닌가(요 13:34; 15:12)!

결국 이 악한 세대의 특징인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받은 사랑의 크기와 성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발을 씻기신 것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더 크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깊이 헤아린다면 어떻게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고집하며 살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삶에서 나보다 주님, 나의 유익보다 형제의 유익, 나의 편안함보다 자매의 편안함, 나의 억울함보다 배우자가 받은 상처와 눈물, 나의 권리보다 성도 사랑, 나의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앞서야 한다.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이 되려는 자신을 쳐서 복종 시켜 철저히 하나님과 우리의 유익을 구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악한 세대에 물들지 않고 그들에게서 돌아서는 삶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