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유신 진화론자들은 중세 신학자 어거스틴(A.D. 354-430)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하고 강조한다. 참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명백히 말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시 31:5) “지혜가 무궁하”시다(시 147:5). 그리스도는 “내가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요일 5:6).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유신 진화론자들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일반계시’라고 부른다) 특별계시 즉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와 구분하고 평행선상에서 보려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유신 진화론자 우종학 교수는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경(특별계시)과 자연(일반계시)이라는 두 가지 책을 쓰셨고, 두 책을 읽는 방법은 각각 성경 해석과 과학이라고 말했다(새물결플러스, 2017, 33p).
시편 19편을 비롯하여 성경이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만물과 성경을 통해 진리를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하늘과 궁창, 날과 밤, 해 등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고(롬 1:20), 구약 선지자와 신약 사도를 통해 기록하신 성경 역시 하나님의 선하고 의롭고 온전하신 뜻을 나타낸다(딤후 3:16-17). 그래서 역사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두 가지 종류의 계시를 인정해 왔다.
하지만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적 형태의 이원론은 칸트나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두 종류의 계시를 구분하는 것을 넘어 완전히 분리한다: 정신, 가치, 자유, 영혼에 관한 영역 그리고 물질, 자연, 사실, 이성에 관한 영역. 유물론적 이원론에 따르면 성경이 신학과 신앙을 다루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다만 자연과 물질을 설명할 최종 권위는 과학에게 내주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종교활동을 하는 것과 과학의 설명으로 만물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상충이 없다. 서로 완전히 다른 종류(혹은 영역)의 진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선언>에서 과학에 깔린 유물론적 이원론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으로의 철학적 변화에 근거하여 유물론적 과학이 나타났다. 이 변화는 발견된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물을 그런 방식으로 보겠다는 신앙적인 결정이었다(생명의말씀사, 2011, 40p)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쉐퍼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공격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기독교인들이 이 세대의 격량에 기습을 당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성경 해석은 성경 해석으로, 신학은 신학으로, 철학은 철학으로만 배웠고, 미술에 관한 것이면 미술로, 음악이면 그저 음악으로 공부할 뿐, 이러한 것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에게 속한 것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는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생명의말씀사, 2019, 25p)
신앙과 신학에 관한 진리는 성경을 통해 성경 해석으로 얻고, 자연에 관한 진리는 만물을 통해 과학 해석으로 얻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쉐퍼의 말에 따르면 진리는 종류와 영역이 달라도 “서로 아무런 관계없는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다. 하나님의 진리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통일된 세계관으로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포괄적, 총체적 진리이다. 그래서 낸시 피어시는 <완전한 진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독교를 삶과 실재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포괄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으로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저 종교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인 것이다(복있는사람, 2006, 216p)
우리는 쉐퍼와 피어시의 경고를 매우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첫째, 성경과 자연 모두 같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하신 것이고, 둘째, 하나님이 분리되거나 모순될 수 없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 또한 분리되거나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신 진화론자들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고 말할 때, 그 말에 내포된 다음의 의미에도 동의하기를 바란다. “또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진리를 관통하는 통일된 세계관에 부합해야 한다.”
물론 대다수의 유신 진화론자들은 유물론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유신론적 이원론을 수용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과학으로 자연을 해석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것과 상반된 주장을 한다면, 실제로 그들은 유물론적 이원론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성경과 과학이 두 종류의 하나님 진리를 설명하는 해석 도구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과학의 해석으로 성경의 해석까지 수정해가면서 총체적, 포괄적 하나님의 진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진리 체계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며 통일된 성경의 세계관 자체가 뒤바뀌게 된다.
예로 테드 피터스와 마르티네즈 휼릿이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에서 소개한 진보적 개신교인 존 쉘비 스퐁의 견해를 들어보자.
뉴저지의 성공회 주교로 은퇴한 존 쉘비 스퐁은 아마도 진보적 개신교 입장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다윈은 성서문자주의와 7일 창조이야기를 분쇄시켰다.” 그는 이어서 언급하기를, 성경의 권위가 깨졌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과학의 함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함의 중에 하나가 바로 구속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에덴 동산은 없었다. 태초의 완벽한 상태도 없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그러한 상태로부터 타락한 것이 아니다. “다윈은 완결된 완전한 창조 세계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독려한다.” 스퐁에 따르면,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과정이다.” 과학이 스퐁에게 말하는 것은 소위 “타락”이라 불리는 어떤 게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구원에 관한 기독교적 이해에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보다 높은 단계의 인간성으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내포하며, 예수님의 구원사역 역시 이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퐁은 우리가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시작했다가 그 다음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의 상태에서 시작했으며 더 나은 상태로 진보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이하의 상태에서 출발해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인간 조건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스퐁은 구원 이야기를 다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잃어버린 순결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진화함으로써 도달하게 될 상태의 모델을 제시해준다. “우리로 하여금 더 철저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초청하고 독려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새롭게 말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도서출판 동연, 2015, 181-3pp).
피터스와 휼릿은 스퐁 주교가 다윈과 성경을 모두 받아들였으며 여전히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다고 평가한다. 당신이 보기에도 그러한가?
우리는 앞으로 유신 진화론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기 원한다. 먼저, 가장 앞에 세워진 진리의 초석, 태초(the beginning)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