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이제 내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 타락한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할 그리고 우주와 지구의 진화적 역사의 과정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할 사이에서 완전히 화해 불가능한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 아모스 용(퓰러신학교 교수)

갈등의 원인: 세계관 충돌
우리는 지난 칼럼들을 통하여 유신 진화론과 성경 사이에 화해 불가능한 갈등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신 진화론자들은 끊임없이 진화와 성경의 조화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진화는 결과적으로 창조-타락-구원-완성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구속사(성경신학) 그리고 성경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에 관한 가르침(조직신학)에 치명적인 결함을 일으킨다.

그러면 왜 진화는 성경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바울은 골로새 교회 편지하면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를 좇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 초등학문, 사람이 만든 전통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골 2:8). 진화는 과학이 아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증명하려고 애쓰는 가설 혹은 이론이다. 모든 이론에는 전제가 있다. 전제는 다른 말로 ‘세계관’ 혹은 ‘철학’이라 말할 수 있는데, 진화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바로 유물론이다. 보이는 세계, 물질로만 세상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유신 진화론이 설명하는 ‘창조’에서 하나님만 빼면 사실 무신 진화론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유신 진화론은 무신론적 진화론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주장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배후에서 조정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유물론에 신을 끼워넣으려는 것이다. 그들이 수용하는 ‘진화론’의 근간에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유물론이 깔려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게 정상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관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니 불협화음만 잔뜩 생긴다.

사실 신학계에서 진화론처럼 성경과 모순을 일으키는 이론이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1) 고등비평 이론.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인 성경을 연구할 때 고등비평 이론을 사용하면 되려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고 오류가 발생한다. 이는 고등비평 이론이 성경의 신적 특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유한하고 실수할 가능성이 높은 인간적 특성만 고려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2) 자유주의 이론. 자유주의 세계관은 이성을 성경보다 높은 권위에 둔다. 그래서 자유주의 이론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은 항상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소견(이성)에 옳은 대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결코 인간이 만든 이런 철학을 수용할 수 없다. 예수님이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물을 포도주로, 기능을 상실한 팔과 다리를 완전한 상태로,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 물고리를 오천 명이 넘는 이들이 먹을 정도의 음식으로, 죽은 시체를 산 사람으로 단번에 바꾸시는(창조하시는) 분, 세속 철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태초에 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셨고, 사람을 자기 형상에 따라 만드셨으며, 사람이 범죄했을 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죄의 저주를 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진화 철학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학문을 따르게 할 뿐이다. 그 헛된 속임수에 속지 말라.

교훈
그러면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 그래서 진화 철학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첫째, 진리를 가르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진화론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세계관 심지어 기독교 내부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론들이 성경이 아닌 세속 철학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성도가 이런 거짓 가르침에 쉽게 속는다. 진리 위에 바로 서 있는 자들은 단지 그들이 틀렸고 우리가 맞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지 말고 더 실력을 갖추고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무엇이 왜 가짜인지 세세히 밝히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짜가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이 경고한대로 많은 이들이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것이다. 그러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범사에 가르치고 경책하고 권하자.

둘째, 진리를 살아내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유명한 말 중에 ‘당신의 삶이 내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삶과 말이 일치되지 않을 때 청중은 아무리 아름답고 옳은 말이라도 듣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 중에는 그 진리가 자기 삶에 어떻게 힘 있게 역사하는지 보여주는 데 실패한 이들이 적지 않다. 유신 진화론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성경을 손에 들고 진리를 지킨다고 부르짖는데, 정작 그 삶에 분노와 정죄가 가득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다(고전 13:2, 6).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진화 철학을 배척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 사랑과 자비가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도 맞다.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참된 것을 “오직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엡 4:15).

셋째, 진리의 주를 사랑하라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예수님이 만난 종교인들은 아는 것이 많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5:8). 우리가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진리의 주님을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요 17:3), ‘아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이었다.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유신 진화론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을 믿는 당신은 믿고 있는 진리를 통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의 주님을 더욱 마음으로 경험하고 있는가? ‘살아내지 못하는 진리는 내가 아는 진리가 아니라 사실 모르는 진리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우리가 믿고 지키고 전파하고 살아내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데서 자라가는 지식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참 진리라면 그분을 더욱 알고 그 은혜를 더욱 경험하고 그래서 주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