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화석 기록은 분명히 많은 동물이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죽었음을 보여 준다…진화에는 고통, 죽음 및 생물의 멸종이 포함되어 있다 – 데보라 하스마
앞서 살펴본 바대로 유신 진화론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오랜 생물 진화를 받아들이려면 폭력과 살생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출현 이전에 수십억 년 동안 동물의 죽음이 있었다. 죽음이 반드시 포함되는 진화 방식에서 사람만 예외일 수는 없다. 유신 진화론자 하스마는 이렇게 설명한다.
약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타락 이전의 피조 세계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같은 신정론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많은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그 시스템이 비록 고통을 포함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과 우리의 전체적 유익을 위해 가장 좋은 시스템을 설계하셨다는 주장의 어떤 형태를 수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몸소 하신 일,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고통과 죽음을 겪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흔히 묘사되는 것만큼 극단적이 아님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진화를 ‘이빨과 발톱에 피가 묻은 자연’으로 묘사하지만, 진화 과정은 종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게 하므로, 진화는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낮춘다.
<창조, 진화, 지적 설계에 대한 네 가지 견해>, 215p
좋게 표현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진화는 ‘이빨과 발톱에 피가 묻은 자연’ 과정을 가정한다. 뱀 한 마리가 갓 태어나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들쥐 새끼 여섯 마리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고통은 극단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것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전체적인 유익을 위해(가령 우월한 종족이 보존되고 열등한 종족은 제거되어 인류 전체가 진화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는가?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어떻게 봐야 할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하스마가 ‘우리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답’으로 꼽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신학적으로 고찰해 보자. 만일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직접 고통과 죽음이 만연한 시스템으로 만물을 설계하시고 나중엔 그것을 해결하러 직접 오신 것이라면 이것을 은혜의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실수를 만회하러, 고장 난 시스템을 고치러 오신 것처럼 보이진 않는가?
고장 난 책임을 사람에게 묻지 않고(원죄), 고장 난 상태를 정상이라고 말하면(타락, 부패, 고통, 죽음), 결국 그 책임이 시스템을 만든 분께 돌아가고, 그분이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하고자 하신 일의 의미가 희석된다.
유신 진화론자들은 로마서 5장 12절이나 창세기 2-3장의 기록을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계시하신 뜻을 위반할 경우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결과적으로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저주와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남을 당한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lbid., 214p) ‘안 죽었잖아’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은 분명 죄의 결과로 주어진 저주 가운데 하나고, 아담은 분명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창 5:4-5). 즉시 죽이지 않으신 건 하나님의 은혜이지, 말씀하신 것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창세기 5장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죽었더라”가 아니던가?(8번). 참고로 창세기 1-4장까지 이 단어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죽었다고 말할 때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5장부터는 끊임없이 나온다(883번,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면은 ‘죽이다’의 뜻을 지닌 הרג이 쓰였다.).
성경은 죽음이 모든 사람의 원수라고 분명히 말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1)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단지 ‘영적인 죽음’만이 아니다. 그랬다면 “혈과 육”이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그”는 육신(“혈과 육”)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 ‘영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통해 그 일을 이루셨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들은 육체의 죽음과 그 너머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죄인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곧 ‘영적 죽음’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상태이다(롬 1:28-32). 그래서 죄에 매여 한평생 종 노릇 하는 것이다.
2)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죽은 자”에 관한 그들의 염려를 해소할 때, 그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며, 성도는 “혈과 육”을 벗고 하늘에 속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란 소망을 선포했다(고전 15:35-58). 여기서 말한 성도의 죽음이 ‘영적 죽음’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성도를 낙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했던 죽음,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 완벽한 반전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죽음은 바로 ‘육신의 죽음’이다.
3) 예수님은 무덤에 묻혀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으냐”라고 물으셨다(요 11:25-6).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죽음은(“죽어도 살겠고”) 분명 ‘육신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단지 영적 죽음을 해결해주신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입증된 것처럼 육신의 죽음도 해결해주시는 분이란 사실을 입증한다.
4) 성경에 따르면 죄는 모든 만물의 죽음 그리고 인간의 육적, 영적 죽음을 초래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모든 죄의 저주를 끊게 하셨다(창 3:15).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고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온전한 구원의 날이 아닌가?(롬 8:19-23). 만일 죄의 정확한 시작점을 모르고, 죄를 범한 책임자를 모르면서 육신의 죽음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창조 시스템이라고 말한다면(자연사뿐 아니라 살생이나 살인까지), 피조물이 우리와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그것,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장차 가져오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자연스러운 죽음을 왜 부활의 능력으로 이기게 하신다고 약속하시는가? 분명한 건 죽음의 쓴 맛을 모르는 자는 구원의 단 맛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속사의 중요한 흐름인 창조-타락이 진화로 인해 어떻게 훼손되고 무너지는지 살펴봤다. 그리고 이는 유신 진화론자가 절대로 안전하다고 자부한 ‘구원’ 그리고 ‘완성’의 메시지까지 파괴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다음 장면 ‘구원’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1. 유신 진화가 말하는 창조: 하나님이 수십 억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
2. 유신 진화가 말하는 타락: 진화 과정엔 범죄와 상관 없이 죽음, 고통, 저주가 수반된다
3. 유신 진화가 말하는 구원: 어쨌든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다
질문: 왜 모든 사람이 죄인인가? 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스도의 대속이 이룬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