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잃어버린 순결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진화함으로써 도달하게 될 상태의 모델을 제시해준다 – 존 쉘비 스퐁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성경의 약속은 유신 진화론자에게 어떤 소망을 줄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고통, 죽음, 저주를 창조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더는 고통이 없고 죽음도 없으며 저주가 영원히 사라진 세상은 하나님이 심히’ 좋지 않은’ 세상을 태초에 만드셨다는 것을 반증하는가? 아니면 죄의 끔찍한 결과와 그것을 완전히 역전시킨 구원의 놀라운 능력을 선포하는가? 먼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자.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엔 죽음과 고통, 저주가 없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1, 4-5)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여 보좌에 앉으셨다. 그분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선포하셨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 하지만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를 죄로 물들였고 그 결과 죽음, 고통, 저주가 임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모든 저주를 끊으신 예수님께서 지금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보좌에 앉아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선언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다시 있지 않을 것들이 있다.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 이 네 가지만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 사라진다. 그중에 질병(아픈 것), 모든 정신적, 관계적, 육체적 문제에 따른 애통과 눈물, 그 극단적 결과인 사망이 이제는 영원히 사라진다. 신실하시고 참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글로 써서 확정하셨다.
계시록 22장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란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5)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8). 땅만 저주를 받은 게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았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를 가리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라 말했다(롬 8:20). 피조물들은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 그런데 피조물이 고대하고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이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그날인 것일까? 계시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몸의 속량을 얻는 그 날이 바로 ‘다시 저주가 없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세계가 ‘저주가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창조되는 날이다.
우리는 계시록에 기록된 고통, 죽음, 저주가 없는 이 놀라운 종말을 창세기에서부터 예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옛 뱀 사탄을 저주하실 때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창 3:15). 이는 신학자들이 ‘원시 복음’이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은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피조세계가 받은 저주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둘째 아담의 순종을 통해 완벽하게 제거할 계획을 처음부터 말씀하셨다.
유신진화론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엔 죽음, 고통, 저주가 없나?
처음에 소개한 스퐁 주교의 종말론 역시 더 나은 세상을 전망한다. 하지만 죽음과 고통, 저주가 없는 세상을 스퐁 주교가 진실로 바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는 더 나은 인간성으로 진화된 종말을 기대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 우리가 종말에 도달하게 될 완전한 인간성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완전한 인간성’은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관계적 진보를 약속할 수는 있어도, 유한한 인간의 특성까지 바꾸진 못한다.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고통이 없을 수 있는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가? 스퐁이 모델로 삼은 완전한 인간성을 가진 예수님도 고통, 죽음 심지어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셨다. 그러면 그가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엔 죽음, 고통, 저주가 그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유신 진화론자가 스퐁처럼 극단적인 종말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신 진화론을 견지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종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걸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종말 곧 고통과 죽음과 저주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받아들인다면, 유신 진화론은 이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왜 처음에 ‘좋지 않게’ 창조되었는지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아담이 최초의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그래서 죄의 책임이 왜 사람에게 있는지 명백히 밝히기 어려울지라도, 애초에 왜 하나님이 만물을 고통, 저주, 죽음이 필연적인 세상으로 창조하셨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부활하여 보좌에 앉으시고 더는 고통, 죽음, 저주가 없는 세상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가?
우리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구원의 역사(구속사) 마지막 부분인 ‘완성’을 살펴보고 있다. 창조의 날만 재해석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구속사는 창조-타락-구원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결국 완성까지 망가뜨린다. 모든 하나님의 진리는 체계적으로 통일된 세계관에 의해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데, 그 세계관이 진화론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러면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의 이야기는 길을 잃는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던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여버린다. 말을 만들다 보니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고 억지로 연결하려다 보니 엉뚱한 결말로 치닫는다. 유신 진화론이 약속한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복음’이 철저하게 훼손된다.
주권의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은 진화를 계획하거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무작위’가 아니라 ‘작위’다.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다. 하나님이 주권적이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피조세계가 그 특성을 띤다. 하나님은 어떤 법칙과 원리에 제한된 분은 아니다. 하지만 그 법칙과 원리대로 작동하도록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만물의 이치에 적용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적용된다. 신론, 기독론, 인간론, 죄론, 사탄론, 구원론, 교회론, 성령론, 성경론, 종말론 등 성경을 근거로 구축한 교리는 인간의 이해의 폭을 넘어가는 진리를 다루기도 하지만 매우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어 ‘조직신학’이라 부른다. 하나님이 창조부터 종말까지 역사하신 방식 또한 우연히 혹은 돌연히 발생한 일들로 채워진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철저히 계획하시고 통제하신 사건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를 ‘성경 신학’이라 부른다.
그런데 진화론은 조직신학의 근간을 뒤흔들어 각 영역을 파괴한다. 하나님은 신뢰할 수 없는 분이고 계획이 불분명한 분이다. 세상을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시니 선하신지도 알 수 없다. 성령으로 성경을 기록하셨지만 우리는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을 수 없다. 고대근동 문화를 옆에 두고 해석해야만 본문의 원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고 죄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죄의 결과는 필연적 과정에 불과하다. 그럼 사탄은? 구원은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말인가? 성경이 약속하는 종말은 과연 무엇인가? 모든 영역에 의심과 불신의 먹구름이 낀다. 우리가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확인한 것처럼 진화론은 성경 신학도 망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진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꼬인다.
과연 진화는 성경과 친구가 될 수 없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럴까? 마지막으로 다음 칼럼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