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교리에 있어서 예정과 선택의 대립만큼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 요소가 있을까? 대표적인 인물로 칼빈과 웨슬리를 들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던 칼빈 그리고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두 인물을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천국에서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영원히 맛보는 삶을 형제로서 함께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생각보다 풀기 어렵다. 만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받을 사람을 다 정해두셨다면,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거나 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예정되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는 게 아닌가? 반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그 행위에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다면, 죄로 인해 그리스도를 선택할 의지가 없거나 아주 적은 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닐까? 갓난아기는 어떻게 될까?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때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는 과정이 전적인 자유의지에 달렸다면 은혜는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예정과 선택의 문제는 통합된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두 개의 평행을 이루는 철로처럼 만나는 지점 없이 성경이 지지하는 두 가지 진리로 작용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문제가 없는 성경적인 진리이다. 그러면 성경이 정말 예정과 선택에 대하여 하고 있는 말을 살펴보고 두 가지 요소가 복음 교리 안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복음 교리 안에서 예정과 선택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반응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 그리고 구령의 열정과 확신이다.
1. 하나님은 예정하신다(O/X)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택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두 가지 예정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첫째,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셨다고 보는 관점이다.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을 사람을 미리 내다보시고 그들을 정하신다는 것이다. ‘아무개가 2020년 10월 14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구나, 그럼 그를 구원받는 자로 택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하신다는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택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택하심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런 식의 택하심은 주체가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먼저 택하고, 그 결과를 미리 내다보신 하나님이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뿐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누구든지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 자체를 택하시지 않고 구원받는 방법을 택하신 것으로 마치 그리스도라는 방주를 구원의 도구로 창세 전에 택하셔서 누구든지 그 안에 들어가면 창세 전에 그를 택하신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누가 구원을 받을지 정하지 않으신 것과 별반 다를 것 없고, 나아가 누가 그리스도를 영접할지 미리 아셨는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앞의 두 가지 관점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선포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이처럼 성경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아주 강력하게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원하는 대로 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 많은 참새보다 귀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무런 주권이 없으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마 10:29-31). 하나님의 허락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없고, 하나님의 정하심 없이 구원받는 사람도 없다.
중요한 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을 절대로 우리가 미리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가 구원받을 자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예정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받았음에 감사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게 만든다.
또한 전도에 있어서 예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두 가지 유익을 준다. 하나는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온전히 전도자에게 지워진 책임이 아니라는 점에서 쓸데없는 부담과 죄책감을 줄일 수 있고, 둘째로 하나님이 정하신 백성이 있기 때문에 구령의 이유와 동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많은 비방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행 18:9-10). 전도자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씨뿌리는 일에만 충성을 다하면 된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복음의 씨가 심겨져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열매가 없을 것이다. 예정 때문에 구령의 열정이 식거나 동기부여가 안 된다면 그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전도자가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실 것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일 씨 뿌리는 일에 충성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를 전도를 통해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믿으라’고 요구하시고 그 책임을 물으신다(O/X)
성경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메시지가 그랬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어떠했는가? ‘택하심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가 아니었다. ‘믿으라’였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믿고 믿지 않고에 따라 책임을 진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3:18).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그러면 이 자유로운 선택과 예정을 어떻게 같이 이해할 수 있을까? 완전히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계는 정할 수 있다.
먼저, ‘믿으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예정을 핑계삼을 수 없다. ‘나는 믿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라거나 반대로 ‘나는 믿지 않기로 정해져서 선택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 영역에 감춰져 있다. 오직 믿은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택하심에 감사할 수 있고, 믿지 않고 죽은 자만이 예정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 말씀이 예정에 갇혀있다면 어떻게 들리는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 봐도 어떤 이에겐 소용 없을 거라는 말밖에 안 된다. 하나님의 예정은 누군가의 선택에 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를 유기하기로 정하시거나 반대로 구하지도 않고 찾거나 두드리지도 않는 자를 구원하기로 택하시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정죄를 받는 자는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믿지 않기를 강력하게 원한 결과로 그리될 것이고, 구원을 얻는 자 역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예정과 선택의 조화를 잘 설명해준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예정과 믿음(선택)은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다. 둘을 한꺼번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예정과 선택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기쁨의 찬송을 자아낸다. 둘 사이에 싸움을 붙이지 말라.
3. 예정과 선택은 굳이 알 필요가 없다(O/X)
워낙 예정과 선택 사이 논쟁이 많다 보니 어떤 이들은 그냥 모른 척 하며 살고 싶어 한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복음을 전하며 ‘믿으라’고 요청하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성경이 말하는 예정과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상상의 날개를 펴지 않는 것, 그래서 억지로 둘 사이를 하나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실제로 많은 문제로부터 안전하게 우리를 지켜준다.
하지만 예정과 선택은 성경에서 결코 작은 교리가 아니다. 이론적으로 복음 교리를 정립하는데만 필요한 철저히 교리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예정과 선택이 아주 큰 적용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하나님의 택하심을 아는 것은 형제자매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변화시킨다. 성도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창세 전부터 받고 있고 영화롭게 하시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 은혜 아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지체를 내가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소망이 없다고 포기하거나 거리를 둘 이유가 있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삶의 굴곡에 따라 구원의 확신을 잃거나 큰 좌절에 빠졌을 때,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바라보게 한다. 사망의 몸을 가지고 날마다 죄와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몸을 생명의 몸으로 바꾸실 것이며 죄와의 전쟁에서 이미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걸 기억하라. 크게 낙심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초월하는 은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마지막으로 ‘선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다. 신자는 최초의 믿음, 선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것 곧 성화에 대해서도 말하고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순종(선택)을 모두 강조한다. 당신은 계속해서 선택해야 한다. 당신의 지체를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롬 6:13). 이것이 당신의 구원을 결정하지 않지만, 당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요청하시고 그 순종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예정과 선택은 적이 아니다. 예정은 선택을 불러내고 선택은 예정에 뿌리를 둔다. 예정의 은혜는 선택을 불러일으키고, 선택의 책임은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온전히 의지한다. 둘을 적으로 만들지 말고 친구로 만들라. 그리고 복음 교리 안에 예정과 선택이 함께 어우러져 당신에게 가져오는 기쁨과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오직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