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필자는 존 맥아더 목사가 총장으로 섬기는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유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미국 교계에서 그리고 학계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하나의 성경적인 견해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달라스 신학대학원, 남침례교단 등), 한국 교계와 학계도 비슷한 수준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아주 독단적인 교회나 신학교가 아닌 이상 세대주의 종말론을 이단처럼 취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면서 자기 견해의 성경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건전하고 서로에게 덕이되게 논의할 수 있는 태도와 포용력을 보였기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까지 세대주의 종말론을 대놓고 미워하거나 비판하는지는 몰랐다. 물론, 한국의 모든 교회나 신학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세대주의 종말론을 대하는 미국과 유럽의 태도와 한국의 태도는 차이가 있었다.

왜 그럴까? 어쩌면 다미선교회, 은혜로 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이단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악용하여 교세를 늘리고 신도를 착취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제 그리스도께서 오실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으로 교인을 압박하면서 휴거되면 땅에 그냥 남게 될 재물을 모두 바치라고 요구하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은 매력적인(이용하기 좋은) 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악용되고 있다는 이유로 그 교리를 해로운 것을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기독교 교리 중에 악용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종말론에 관하여 세대주의 종말론의 맞은편에 있는 언약주의 종말론 역시 주류인 만큼 더 많은 악용 사례를 낳고 있다. 신사도 운동과 뒤섞인 형태로 땅 밟기 등을 하고 복음과 거의 상관없는 사회 운동과 참여 등에 교회의 자원을 쏟아붓고 매진하게 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을 앞당기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종말론은 견해가 다를 수 있는 부분이다. 성경을 통하여 자기 분별을 견고하게 입증하고 다른 견해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태도를 갖거나, 나아가 ‘너는 이단 곧 적그리스도다’라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 종종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모두 일치하는 교단이나 교회 간 종말론의 견해 차이로 심각한 비방과 정죄가 오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영원히 교제할 사이가 아닌가? <겸손한 칼빈주의>를 쓴 제프 메더스나 <목숨 걸 교리 분별하기>를 쓴 게빈 오틀란드처럼 어떤 교리에 관한 분별과 견해가 서로 다르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목숨 걸고 제거해야 할 원수로 식별해서는 안 된다. 자기 견해가 옳다고 강한 확신이 들면 들수록, 언제나 사랑과 함께 역사하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사랑으로 겸손하고 온유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형제단의 종말론은 세대주의 종말론이다. 대부분 전천년설, 환난 전 휴거를 지지한다(환난 중 휴거를 믿는 교회도 있다). 교회사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신학교에서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시작을 기독교형제단의 존 넬슨 다비에게서 찾는다. 크레이그 블레이징과 대럴 박은 <점진적 세대주의: 하나님 나라와 언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참고로 ‘형제회’, ‘형제 모임’은 ‘기독교형제단’의 다른 이름이다).

처음에 세대주의는 19세기 초 영국의 형제회(Brethren) 활동에서 구체화 되었다. 형제 모임은 종파 간의 파벌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영속화시키는 안수받은 성직자들의 특수한 직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일반 성도들의 영적인 은사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서로 성경적으로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유에 강조점을 두었다.

평신도들의 온전성(integrity)과 책임감을 증진시킴으로써 형제회는 개인적인 경건과 성경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목도했다. 이 운동으로 인해 많은 양의 주해적이고 경건한 문학서적들이 탄생했으며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벤쟈민 윌스 뉴톤(Benjamin Wills Newton), 조오지 뮬러(George Muller), 사무엘 트레겔스(Samuel Tregells), 윌리암 켈리(William Kelly), 윌리암 트로터(William Trotter), 챨스 헨리 맥킨토쉬(Charles Henry Mackintosh) 같은 저자들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형제 모임의 저작들은 복음주의 개신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특별히 미국에게는 정말로 맞는 말이며, 그것들은 미국의 디 엘 무디(D. L. Moody), 제임스 잉글리스(James Inglis), 제임스 홀 브룩스(James Hall Brookes), 에이 제이 고든(A. J. Gordon), 제이 알 그레이브스(J. R. Graves), 씨 아이 스코필드(C. I. Scofield) 등과 같이 저명한 사역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CLC, 18p).

한국의 주류 교단 그리고 주류 견해는 세대주의가 아니라 언약주의이다. 성경을 보는 틀 혹은 큰 그림이 다르다는 말이다. 신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등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종말론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보통 세대주의 종말론과 언약주의 종말론으로 비교된다. 성경 해석의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 혹은 일부에 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건전하고 성경적이며 유익한 교리를 구축하는 데 문제가 없다. 마이클 블락 교수는(전 마스터스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Dispensational Hermeneutics>라는 책을 통하여 세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 방법의 특징과 장점을 이렇게 소개했다(Theological Studies Press, 2023): 1) 문자적-역사적 해석방법을 모든 성경 본문에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 2) 구약 성경의 예언을 문맥 안에서 일관성 있게 해석한다, 3) 특정 구절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른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어떤 본문을 해석하든지 그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 4) 신약에서 반복되지 않은 구약의 예언은 여전히 성취를 기대할 수 있다, 5) 구약 성경의 종말론은 신약 성경에서 재확증된다, 6)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7) 구약 성경의 예언은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이 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성취하신다, 8) 성경엔 모형(type)이 나오지만,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은 옳지 않다.

블락 교수는 반대로 세대주의 성경 해석 원칙을 따르지 않을 때 이런 특징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1) 신약 성경을 우선순위에 두고 구약 성경을 해석한다, 2) 구약 성경의 예언의 문자적 성취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3) 모형론적 해석방법을 따른다, 4) 성경의 ‘언약주의적 줄거리’로 모든 본문을 이해한다, 5)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을 새로운 방식으로(변화된 의미로) 성취하신다, 6) 예수님의 초림에 더 큰 강조점을 둔다. 필자는 조엘 비키와 폴 스몰리가 공저한 <개혁파 조직신학> 시리즈를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부흥과개혁사, 2023). 존 프레임이나 웨인 그루뎀, 밀라드 에릭슨의 조직신학 또한 각각 다른 관점으로 다룬 책이지만 성경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책이다. 이처럼 세대주의와 언약주의는 각자가 성경을 보는 관점을 통해 서로에게 풍성한 유익을 끼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전도와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에 충분한 시간을 쏟을 수는 없다고 자포자기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그런데 개혁주의도 같은 오해를 산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면, 구태여 우리가 전도하거나 국경을 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이런 우려들은 순전히 교리를 잘못 받아들인 결과다. 실제로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진 기독교형제단에서—그들의 적은 규모를 생각할 때 더더욱—셀 수 없이 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 곳곳에 파송했다. 짐 엘리엇이나 허드슨 테일러는 잘 알려진 기독교형제단 선교사이다. 고아와 과부를 돕는 등 사회 참여는 덜 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린 죠지 뮬러는 기독교형제단 출신이다. 세대주의 관점을 가진 찰스 스펄전(침례교) 역시 정말 많은 자선 사역에 힘썼다. 또한 개혁주의 토양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설교자와 선교사가 배출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구제 사역이 일어났는가? 그러므로 전도, 선교, 구제 사역 등을 이유로 서로의 견해를 비판하거나 불필요한 우려를 나타낼 필요는 없다.

경기도 용인시 남사읍에 위치한 작은 전원 교회 유평교회는 1965년 지금까지 세대주의를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틀로 붙잡고 있다. 기독교형제단에서 그 출처를 발견할 수 있지만, 지금은 많은 복음주의 교회와 교단 신학교에서 계속해서 더 정교하고 견고하게 전수하고 있는 교리이다. 교회는 선교사의 희생과 헌신으로 시작됐고, 자라나면서 지역 전도에 힘썼다. 10년 정도 미얀마 교회 목사들 훈련을 시키는 선교 사역에 힘썼고 싱가포르 교회와 협력하여 성경 학교도 세웠다. 지금도 지역 사회 봉사 및 전도 그리고 선교 사역에 어떻게 더 충성할 수 있을지 계속해서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기독교형제단은 유평교회가 실천하는 많은 영역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유산을 남기고 있다. 신자들의 교회가 실제로 실천되는 데 있어서, 교회 직분자에 관한 세속적이지 않고 성경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교회를 예배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예배하는 곳이 되게 하는 데 있어서, 공예배를 넘어서 일상이 예배가 되게 하는 데 있어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삶을 드리는 제자를 양성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삼는 데 있어서 기독교형제단의 선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만큼 크다.

하지만, 유평교회는 전통은 언제나 성경의 권위 아래 굴복해야 할 시녀라고 믿는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행 17:11). 성경이 교회가 하는 모든 전통을 빚고, 모든 사역을 검증하고, 모든 가르침과 섬김과 헌신의 내용과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교회. 그리스도가 머리로 다스리시는 교회.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