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이 일곱 가지 성례를 필수적인 예전으로 믿고 실천하는 것과 달리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은 복음주의 개신교 대부분은 두 가지 성례만을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그래서 교회가 성실하게 지켜야 할 예전이라고 믿는다: 세례와 만찬(마 28:18-20; 고전 11:23-26). 교단마다 실천이 조금씩 다르고(예: 세례, 침례, 유아세례 등) 용어도 다양하지만(예: 만찬, 성찬, 주의 만찬, 떡과 잔 등), 두 가지 예식이 담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 교회가 이를 실천하는 일에 헌신한다는 면에서는 서로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 형제단(Christian Brethren) 역시 두 가지 예전에 헌신한다. 신자들의 교회를 교회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참으로 거듭난 신자에게만 침례를 베풀어 교회의 지체가 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한 몸이 된 지체는 이후로 만찬에 참여하여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념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교회의 권징을 받은 성도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형제단은 작은 규모의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허드슨 테일러나 짐 엘리엇과 같은 선교사 파송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에 힘썼다. 또한 초대교회가 “주간의 첫날에…떡을 떼려 하여 모였”던 것처럼(행 20:7), 기독교 형제단은 매주 떡을 떼는 만찬 예배를 매우 중대한 예전으로 여겨왔다.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기독교 형제단은 성별과 교단과 직분과 나이 등 아무것도 장애물로 두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하는 성찬 예배에 매주 나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감사드리며 그분 안에서 모두가 뜨겁게 사랑하는 형제자매라는 고백을 드려왔다.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는 만 명이 넘는 성도가 출석하는 대형 교회이다. 두 번의 대예배(main service)에 각각 삼천에서 사천 명 정도의 신도가 참석하는데, 그들에게 떡과 잔을 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침례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는 그리스도의 명령인 두 가지 예식의 의미를 모든 성도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주일 저녁마다 침례받을 사람이 있는 경우 어김없이 강대상 뒤편에 설치된 침례탕을 개방하여 침례식을 가졌다. 침례에 순종하는 성도의 간증을 듣고 몇 가지 질문을 나눈 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어 참석한 모든 성도에게 ‘보이는 말씀’인 성례의 은혜를 나누었다. 성찬식은 기독교형제단처럼 매주 하지는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 혹은 석 달에 두 번 정도 가졌다. 설교를 마친 맥아더 목사가 대표로 떡과 잔을 나누기 앞서 각각 관련된 성경 구절을 낭독하고 집사들이 미리 준비된 떡과 잔을 부지런히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어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으로 성찬식은 마무리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개신교 성찬 예식이 이와 유사한 방식을 따를 것 같다(릭 워렌 목사가 섬기던 새들백 교회도 비슷했다).
한편, 기독교 형제단의 만찬 예전은 독특한 면이 있는데, 떡과 잔을 가지고 주를 기념하기 위한 성경 낭독과 찬송 선곡, 기도 등을 담임 목사가 전담하는 일반 개신교와 달리 구원받은 형제라면 누구나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퀘이커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그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형제단은 성찬식을 할 때, 예배당 중앙 전면에 떡과 잔을 준비하고, 침례를 통하여 거듭난 형제로 인정된 자들이 자발적으로 성경 낭독, 찬송 선곡, 기도 등으로 성찬식을 인도한다. 기독교 형제단 안에서도 어떤 교회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참여하도록 계획을 세우지만, 또 어떤 교회는 완전히 자발성을 띄게 하는 것이 성령이 이끄시는 예배의 의미를 잘 담아낸다고 본다. 이런 예배 방식을 ‘오픈 마이크 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마스터스 신학교에서 전도학을 가르치신 알렉스 몬토야 교수가 섬기는 교회는 기독교 형제단이 아니었지만 오픈 마이크 형식의 성찬식을 실천하고 있었다. <열정적인 설교>(프리셉트, 2013)의 저자이기도 한 몬토야 교수는 그것이 신약성경의 원리에 더 가까운 방식이라고 믿었다.
기독교 형제단과 몬토야 교수가 소중히 여긴 신약성경의 원리는 바로 ‘만인 제사장’ 혹은 ‘만인 사제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로 불리는 사상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이 부활시킨 신약 교회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충실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는(딤전 2:5) 이 교리는 모든 성도의 동등함을 가져오고, 이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없앰과 동시에 은사 또는 직분에 따른 역할 구분을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목사’가 성찬식에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여기는 모든 예배자가 직분과 상관없이 자기 은사에 따라 예배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예배 가운데 일어난 무질서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명령하면서(고전 14:40),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각각 “차례를 따라” 할 것을 권면했다(고전 14:27, 29, 31). 좀 더 많은 성도에게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이 원리는 성찬식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예전에 반영해야 할 일반적인 원리 곧 만인 제사장 원리로 기독교 형제단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한편, 만인 제사장 원리는 성경이 말하는 은사의 원리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주셨다고 말한다(엡 4:11). 만인 제사장 원리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중보자로서 그들을 세우지 않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세우셔서 성도를 돌보고 먹이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그들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은 성령이 뜻하신 대로 성도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셨다고 말한다(고전 12:1-11). 만인 제사장 원리는 각각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교회의 유익을 최대로 높이는 것이라고 믿지, 은사를 무시하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또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기독교 형제단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찬식을 인도하는 활동인 성경 낭독, 공중 기도, 찬송 선곡 등에 은사 구분을 엄격하게 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 설교는 은사를 분별하여 다수의 설교자를 세우는 것이 일반인데, 종종 성찬식과 마찬가지로 거듭난 형제 모두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는 교회도 있다.
한국 개신교에서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일단, 거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고 가르친다. 성찬식에서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처럼 목사의 인도 아래 모든 성도가 떡과 잔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기념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성찬식에서 목사는 중보자가 아니라 예식의 진행을 돕는 봉사자다. 목사와 교사로 섬기는 자는 각각 그 은사를 받고 훈련된 이들로 세우되(제도적으로는 검증된 신학 교육과 목회 소명을 근거로), 그 은사의 크기와 분량대로 각각 주일설교, 청년부 설교, 학생부 설교 등을 맡기고, 보통은 교회를 인도하는 책임과 역할이 가장 큰 담임 목사가 성도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주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편이다. 교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인 한국 개신교의 예전은 성도들에게 제한된 기회를 제공할 소지가 있고(극단적인 경우 철저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참여를 제공하는 문제), 제도적으로 굳어지면서 점점 만인 제사장 원리가 반영되기 힘든 계층 구조를 만들어낼 위험도 있다(예: ‘평신도가 감히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빚는다).
기독교 형제단의 예전은 이런 측면에서 만인 제사장 원리를 더욱 풍성하게 적용하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본을 한국 개신교 전체에 끼칠 수 있다. 특별히 대부분의 교회는 성찬식 자체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크다.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 초대 교회가 적어도 매주 한 번, 어떤 때는 매일 집마다 떡을 뗐던 것에 비하면 심각하게 줄어든 것이다(행 2:46). 예식을 간소화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하신 중대한 명령이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문제다(각 교단에서 나온 성찬에 관한 책을 보면 하나같이 이를 심각한 문제로 지적하는데, 교회 예전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실제로 기독교 형제단의 풍성한 만찬 예식에 오랜 세월 참여한 자로서, 교회는 매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여러 형제들의 입술에서 나온 고백과 말씀 낭독과 찬송시 등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특별히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전해지지 않는 교회에서 성찬식까지 빼버리면, 교회는 금세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신앙과 종교활동의 장소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모든 예배 형식에 전임 사역자 또는 파트타임 사역자만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면, 성령께 은사를 받은 성도가 교회 안에서 자신이 섬길 곳을 찾지 못하고 일반적인 봉사 활동에만 전념하도록 만들 위험도 있다. 기독교 형제단은 이런 면에서 보다 확장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만인 제사장의 원리와 은사의 원리를 조화롭게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성경은 예전의 구체적인 방식을 명령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섬기고, 떡을 떼었다고 말했지, 그것이 반드시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자세히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방식이 더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전히 교만이다. 다만, 교회마다 각각 실천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서 기독교 형제단이 추구하는 예전이 만인 제사장 원리가 잘 드러나는 이점이 있다는 것뿐이다. 몇 가지 과제가 있는데, 1) 거듭난 형제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과 모든 거듭난 형제가 반드시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것은 은사에 따라 교회를 섬기는 원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2) 기독교 형제단의 방식은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점점 더 실천하기 어려운 면이 분명히 있다. 삼천 명이 모인 교회에 오픈 마이크를 두면 굉장히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3) 기독교 형제단은 종종 만인 제사장의 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은사 분별을 경시하는 문제가 있다(특별히 설교에서).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교회가 단순히 몇 사람의 전문 인력으로 돌아가는 예배 서비스 업체로 변질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도가 자기 직분과 은사를 무시하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도록 방치하는 무질서한 놀이터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고 중보자시라는 진리가 우리의 예전에 더 분명히 그리고 풍성하게 드러나게 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 보기 원한다. 자기 방식만이 초대 교회의 원리를 담아낸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전통과 그 안에 담긴 성경의 원리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공동체로 함께 개혁되어 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성령께서 교회의 모든 지체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로 빚어지도록 우리의 예전을 빚어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