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 직분론과 관련이 깊다. 교황에게 어디까지 권위가 있느냐는 문제가 당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들이 풀어내야 했던 가장 곤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교황 위에 되돌려 놓았을 때, 가톨릭의 무서운 핍박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결국 직분론 문제는 굉장히 명확하게 풀렸다. 무소불위의 교황도 성경의 권위 아래 순복해야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바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마 16:18). 로마 가톨릭은 “이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하여 그 권세를 지금까지 교황이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개신교는 그 반석이 베드로가 했던 고백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뜻하는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한 바른 교리와 그 교리에 둔 믿음이라고 해석한다(마 16:16).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에서 직분은 교회의 반석, 머리, 주인 역할을 절대로 탐내지 않는다. 모든 교회의 유일한 반석이 되시고 머리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몸이자 신부인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주신 은사 곧 은혜로운 선물이 직분이라고 본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졌든지(혹은 직분 없이 섬기는 자라도) 그/그녀는 섬기는 일꾼 또는 종이다.
직분에 관한 성경적인 이해는 직분이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그”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엡 4:7). 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는데(엡 4:7), 그 분량대로 주신 은혜의 선물이 바로 직분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선물을 받을 만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할 수 있다(고전 1:31; 고후 10:17). 몇 대째 목사 집안이라거나 몇십 년째 집사로 섬기고 있다고 자신을 높이거나 거드름을 피울 수 없다. 그렇게 부족한 자에게 대대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만이 높임 받으셔야 하고, 오랜 세월 무익한 종에게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또한 직분은 결국 봉사의 직무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아 온전하게 세워 각 사람에게 맡기신 은사의 분량대로 서로를 섬기게 하여 교회 전체가 세워지도록 헌신하고 희생적으로 섬기는 역할이 바로 장로(=감독,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의 역할이다.
문제는 중세 시대 세속적인 전통과 가치가 교회의 직분론을 성경의 원칙에서 멀어지게 만든 것처럼 직분에 관한 올바른 관점은 언제나 세속적인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신 사도들도 처음엔 직분에 관한 세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하고 다투었다(막 9:34; 눅 9:46). 예수님은 여러 번 그들에게 권위주의자가 되어 권세를 임의로 휘두르는 세상 집권자처럼 되지 말고 오직 섬기는 자, 낮은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다(막 10:42-44). 그들의 스승이자 교회의 유일한 통치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사명을 다하는 모습을 그들 앞에서 본으로 보여주셨다(막 10:45). 잡히시던 날 밤에도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섬기는 자의 본을 그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선명하게 보여주셨다. 주와 선생이 되어 보이신 본을 제자인 그들이 따르기를 바라셨다(요 13장). 요컨대 직분과 함께 주어지는 권위는 성도의 발을 씻기기 위한 것이고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지, 임의로 휘두르고 자기 권세를 세우라고 주어진 것이 절대 아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성경적인 섬김의 리더십이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기독교형제단은 ‘형제교회’라고도 불리며 직분이 없는 교회로 단단한 오해를 받고 있다. 사실 기독교형제단 교회 중에서 목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는 교회는 없다(집사도 그렇다). 그런데도 근거 없는 오해와 비방을 받는 이유는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을 ‘목사’ 또는 ‘장로’, ‘집사’라고 부르지 않고 ‘형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런 목회적 실천은(나는 이것을 타협 불가한 교리가 아니라 교리의 다양한 실천 중 하나라고 본다) 신약교회 원리 중 하나로 불리기도 하는데, 직분을 세속적인 권세와 혼동하지 않도록(또는 그렇게 변질되는 것을) 막는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기독교형제단 안에서 직분을 맡은 자는 섬기는 리더십을 추구한다. 모두가 주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라는 점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권위를 임으로 휘두르지는 않는다. 권위는 섬김의 도구일 뿐이다. 성도들도 직분에 따른 권위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인도자를 따르지만, 결코 세속성에 물든 계급주의(‘성직자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굴종하는 방식으로 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형제단 안에서 목사는 단지 목회의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성도이고, 그 밖의 성도 역시 각자 성령이 주신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똑같은 성도이다. 목사에게 주어진 권위는 역할을 위해 주어진 권위이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 차이가 가져온 권위가 절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직분에 관한 이해와 실천을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도 발견했다. 존 맥아더 목사의 강력한 리더십을 수년 동안 경험한 필자는 수많은 성도를 50년 이상 힘 있게 인도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때마침 한 여성이 직접적으로 ‘목사가 성도들의 삶에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는가?’라고 물어본 영상을 봤다. 맥아더 목사는 “전혀 없다”(none)이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자신의 경험이나 교육이나 지식이나 직함이나 직분(position) 등이 어떤 권리도 자신에게 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권위가 있다고 했다.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초창기 교회론을 정립할 때, 기독교형제단 교재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사실 그가 믿고 실천하는 교회론(그중에서도 직분론)은 단지 기독교형제단의 전통이 아니라 성경적인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는 ‘목사’를 ‘목사’라고 부르고 ‘장로’와 ‘집사’를 각각 그 직분에 맞게 부른다. 그러나 본래 주어진 목적과 역할에 맞게 직분을 성경적으로 활용하고 성경이 말하는 권한 밖으로 오용하거나 임의로 남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형제단의 분별 및 전통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까 사실 중요한 것은 호칭이 아닌 셈이다. 모두를 ‘형제’라고 부른다고 해서 직분의 세속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형제’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권위를 임의로 휘두를 수 있다. ‘목사’라고 부르지만 않을 뿐이지 실제로는 성직자처럼 자신을 추앙하고 다른 성도를 통제 및 억압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독교형제단이 성직자제도를 경계한다고 말할 때, 그 참뜻은 단지 뭐라고 부를 것인지를 엄격하게 통제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뭐라고 부르든지(혹은 부르지 않든지) 성경적인 직분론이 바르게 실천되도록 힘쓰겠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직분을 성경의 원칙대로 활용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을 갖춘 직분을 세우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어떤 사람을 감독(딤전 3:1-7), 장로(딛 1:5-9), 집사(딤전 3:8-13)로 세워야 할지 매우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기준 대부분이 성품 그것도 겸손히 섬기며 동역하는데 요구되는 절제, 신중함, 단정함, 관용, 정중함, 순전함 등이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폭력적이지 않으며 가정생활에 충실하여 모범이 되고,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선한 간증을 보이는 자여야 한다. 목사에게는 ‘가르치기를 잘하는’ 능력도 요구된다. 성경은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직분을 맡기라고 했다(딤전 3:10). 교회의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직 성경”에 입각한 직분론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직분을 제대로 분별하고 검증하고 세우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잘못 분별하여 자격이 없는 자를 세울 때, 교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마이클 리카르디 목사는 한 사람의 목사가 무너지는 것은 백 명의 성도가 무너지는 효과가 있다고 하면서, 마귀는 한 사람의 목사를 무너뜨려 그의 돌봄과 인도 가운데 속한 백 명의 성도를 함께 무너뜨린다고 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직분론의 첫 단추를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채우고 있을까?
예전에 대형 교회 초대 장로를 역임한 분과 교제하는 중에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절대로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기어이 목사가 되겠다고 해도 제도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네’라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 세속에 찌든 중세 시대 직분 제도를 부활시켜 교회 안에 정말로 잘못된 직분을 무분별하게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고시를 통과하고 어떻게든 안수를 받으면 ‘목사’라는 자격증이 어김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충격적이게도 이 길고 복잡한 과정 가운데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을 검증하는 장치는 없다. 심지어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거듭난 적도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직분을 매매하거나 직분을 생계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거액을 헌금하여 장로의 직분을 얻는 것과 면죄부를 팔아 베드로 성당을 건축한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떻게 무책임하게 도덕적으로 본이 되지 않고 가정생활이 엉망진창인 사람에게 집사의 직분을 맡길 수 있을까? 중세 시대 교회가 일으킨 수많은 만행의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가 거짓 믿음을 가진 사제와 거짓 믿음을 실천한 교회인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순전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볼 때도 부끄럽고 한심한 이유로 비방을 받는 이유 중 많은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목사로 세우고, 영적인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에게 통째로 교회를 맡겨버렸다. 양들에게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줄 수 없는 자를 목자가 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노회를 결성하여 세속적인 직분 제도를 법제화하고, 교회 안에서는 지극히 세속적인 권위를 휘둘러 성도들 위에 군림한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성경이 요구하는 자질을 철저히 검증하여 소명과 은사를 갖춘 겸손하고 성실한 목사(장로) 그리고 집사를 세우는 교회가 있다. 유평교회는 초등부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회에서 훈련받고 목사와 성도들에게 좋은 간증으로 충분히 검증된 성도를 교회의 다음 일꾼으로 세웠다. 그들에게 직장 및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성경적인 신학대학원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하고, 2년 정도 실제 목회 현장에서 교회의 시험을 거치게 한 후에 공적으로 교회 전체의 지지와 동의를 얻어 목사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게 했다. 이런 방식이 절대적이거나 일반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의 직분은 ‘말씀받았다’고 주장하거나 ‘지역의 복음화를 위하여 스스로 결정했다’거나 혹은 일종의 ‘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이유로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고, 오직 성경이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섬김의 자세로,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성실하게 삶과 말씀으로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가르치는 사람에게 교회는 직분을 맡겨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먼저 되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