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시적으로 고백하며
그분께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이 부르심에 반드시 응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 자일스 퍼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교단을 초월한 모든 교회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신약성경 중 교회에 전달된 편지는 항상 정확한 주소가 아니라 분명한 대상을 위하여 기록됐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교회는 비록 고린도와 각처로 지역별 구분이 가능했지만, 영적으로는 언제나 하나의 정체성을 가졌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사도 요한은 교회에서 나간 무리를 ‘원래부터 교회에 속하지 않았던 자들’로 식별한다(요일 2:19). 단순히 교회 밖으로 이동한 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과 믿고 있는 도리를 배반한 자들을 가리킨다(적그리스도, 2:18).
그러면 교회가 한자리에 모일 때, 그 속에 믿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아가 믿지 않는 자를 차별 대우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이나 교회 안으로 들어와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는 자에게 사랑 안에서 복된 진리를 부지런히 전달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차별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악용하는 죄다. 하지만 구별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 그런가? 첫째, 구별하지 않으면 헌신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끔찍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둘째, 구별하지 않으면 자기 힘과 재능을 자랑하는 불신자에게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겨 교회 전체에 해를 끼치는 비극적인 일을 허용할 수 있다. 교회를 위하여 기록된 많은 서신서가 첫째,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둘째,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열정적으로 권면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교회는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에 합당한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진실로 아는 자인지 모르는 자인지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필자는 자라면서 다양한 교단에 소속된 여러 교인을 만났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모태신앙임을 고백했고, 교회에서 반주자, 예배찬양인도자, 성가대 대원, 교회 학교 교사 등으로 열심히 섬기고 있었다. 목사의 아들도 여럿 있었고(필자가 목사의 아들이라 동질감을 많이 느끼고 친밀히 교류했다), 장로나 집사의 자녀도 적지 않게 만났다. 미션스쿨이었던 고등학교에 다닐 때, 기독교 과목을 가르치고 채플을 인도했던 목사이자 교사이신 분과의 경험도 떠오른다. 그 많고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필자가 속한 기독교형제단과 이질감을 매우 강하게 느꼈던 부분은 (당시 필자의 지극히 제한적인 경험에 기초한 불완전한 판단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필자가 교류했던 많은 이들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교회에 출석하거나 그곳에서의 봉사와 섬김은 뛰어나 보였는데, 학교, 직장, 사회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손가락질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필자가 놀란 부분은 신앙의 고백과 삶의 증거가 보여주는 괴리감이 아니었다(그건 진실로 거듭난 자들에게도 종종 발견되는 연약함이니까). 그런데도 자신을 성도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신한다는 데 있었다.
술담배를 즐기는 아버지가 교회 장로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친구와 분노하면 그렇게 욕을 시원하게 쏟아내는 종교 선생님을 보면서, 누가 이들을 성도라고 분별했으며 교회나 학교의 중요한 영적 직분을 어떤 기준으로 맡긴 것인지 궁금해했다. 교회 건축할 때 수천만 원의 기명 헌금을 하고 장로가 되었다거나 교회 출석 후 2-3년이 되니 집사의 직분을 그냥 주더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교회가 과연 이들의 영적 정체성을 분별한 것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웠고, 교회 출석하는 첫날부터 형제자매라 불리며 ‘성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굉장히 이상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기독교형제단을 제외한 나머지 교단에서는 교인의 구원을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신앙 서적 읽는 것을 좋아하던 필자는 기독교형제단 소속이 아닌 존 파이퍼(장로교), 찰스 스펄전(침례교), 존 맥아더(독립) 등 복음주의 저자가 쓴 책들에서 분명한 복음 교리를 발견하고 우리가 같은 믿음 안에 있다는 확신을 얻으며 기뻐했는데, 필자가 경험한 여러 교단 교회의 실제 모습은 그 믿음에서 상당히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그 무렵 구원파에 소속된 청년과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들도 대한민국 주류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 외에는 참 구원이 없고 진실한 교회도 없다는 믿음을 은연중에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적어도, 구원파는 다른 어떤 교단에 비하여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일—교회가 누구인지 분명히 하는 일에 뛰어나다고 보는 것 같았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 LA에 있는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성경적인 구원론과 교회론이 불협화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초청한 많은 강사들은 다양한 교단 배경을 가졌음에도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했고, 그 복음으로 거듭나 거룩함을 입은 자들을 성도로 구별하는 데 틀림이 없었다.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과 그것을 이어받은 다양한 복음주의 계통 교회들의 실천 속에서 필자는 과거에 경험한 이질감이 지극히 제한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생각보다 많은 교회가 구원론뿐만 아니라 교회론에서도 성경적인 전통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오해가 불식된 것이다. 이후 귀국하여 유평교회에서 10년 이상 목회를 하면서 한국 기독교 안에도 교회를 교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옳게 정의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미국이나 한국에서 그들은 주류가 아니다. 엄청나게 많은 교회에서 여전히 성경과 이질감을 보이는 교회론을 실천하고 있다. 구원론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담임목사가 복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데도 많은 경우 목회 현장에서 교회가 누구인지 분명히 가르치고, 교회에 있지만 아직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참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부지런히 권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기독교형제단의 가장 큰 가치와 매력이 바로 이 부분에서 빛이 난다. 19세기 영국국교회가 철저한 틀에 교회를 가두어 본질보다는 형식에 치중하도록 만들었을 때, 많은 교회가 국교회를 탈출하여 자유로운 교회로 모이는 일에 힘썼다. 정부에 등록하면 교회가 되고, 교회에 등록하면 성도가 되는 등 영적 본질과 점점 동떨어진 교회로 변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독교형제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면 누구나 형제자매로 받아들여 교제할 수 있는 무리로 교회를 이루었다. 그가 국교회 소속이었든, 침례회 소속이든, 혹은 다른 교단 배경을 가지고 있든 하나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과거에 사제(목사)였든 평신도였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배경도 따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성경이 정의하는 성도의 정체성을 갖추었는지만 분별하여 교회로 영접했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기독교형제단에 거듭나지 않은 채 참석했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기독교형제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의 구원(그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 퍼져있는 기독교형제단 중에서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교회도 있다. 그들도 위에 언급한 교회의 정의와 실천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데 있어서는 같다.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형제단이 처음부터 붙들고 있었던 가장 성경적인 전통에 무언가를 추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거룩함을 입고 성도라 불리는 자라면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없이 뜨겁게 사랑하고 교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 아름다운 전통보다 그들만의 전통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교제를 끊고 거리를 두고 경계한다. 은근히 자신들만이 가장 성경적인 교회로 우뚝 서 있다고 자랑하고, 다른 교회는 크게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규모가 작아도 우리는 진짜 알곡만 있고 다른 교회는 가라지만 있다고 비방한다. 심지어 다른 교회에 구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의심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구원파에 다니던 친구에게서 발견했던 무서운 교만을 종종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기독교형제단 안에서 발견한다. 그들의 교만해질 만큼 자랑하고 사랑하는 전통은 결코 기독교형제단이 실천해 온 성경적인 전통이 아니다. 기독교형제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성도, 그 본질적인 진리 하나로만 교회를 정의하고 같은 교회로 뜨겁게 교제하는 일에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았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
바람직하게도 최근에 많은 교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십자가로 인도하는 설교, 복음에 뿌리내린 설교(복음적인 설교) 등의 이름으로 강단에서도 청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촉구하는 노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모두 성도라고 간주하고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자는 식의 설교의 한계를 넘어선 설교가 전해진다). 등록만 하면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 가족 교육을 통하여 교인의 영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참 교회인지 식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를 구별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교회 밖 대사명을 이루는 것과 함께 교회 안에서도 대사명에 순종하여 참 교회가 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제자로 삼고, 제자로서 훈련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살도록 양육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한 마디로 교회란 무엇인가(누구인가)에 관한 성경의 답을 찾은 교회를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이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는 성경적인 토대는 기독교형제단이 고귀하게 간직하고 전수한 바로 그 전통이다. 생각보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공유하는 그 전통은 교회가 누구인지 분명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며 앞서 인용한 자일스 퍼민이 말한 것과 같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진중한 결단을 동반한다. 우리는 누가 참 교회인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반드시 말해야 하며,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절대로 추가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비본질적인 교리에 있어서 분별이 다를 수 있고, 교회 예전이나 실천 부분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 부를 수 있는, 그래서 교제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조건을 분명히 성경적으로 세워야 하고 거기에 아무것도 추가하면 안 된다. 그러면 교회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