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 다닐 때, 이민 온 한국 부모가 자녀에게 부단히 요구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교회 안에서 어른을 보면 먼저 인사하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예의범절의 문제를 넘어 문화적 충돌이 그 안에서 일어났는데, 부모 세대는 어른을 보면 먼저 인사하는 것이 그들이 경험한 문화였다면, 자녀 세대는, 특별히 미국 사회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인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한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인사를 강요받은(?) 좋지 않은 경험이 있던 부모는 어른들이 자기 자녀에게 똑같이 대한다고 느낄 때, 적지 않은 불만을 토로한다. ‘어른이 먼저 인사하면 될 것 아니냐?’, ‘어른들도 모든 아이를 보고 인사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왜 모든 어른에게 인사할 것을 강요하냐?’ 그러면 어른들은 지극히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에 발끈하는 젊은 부모들에게 혀를 차며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성경의 진리는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도리어 문화를 개혁한다. 하지만 진리가 일으키는 개혁은 그동안 각자가 못마땅하게 여긴 모든 것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문화나 전통적 가르침은 성경이 명령하는 것과 그 동기와 목적만 다를 뿐, 같은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인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성경은 유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도를 가르친다. 교회는 유교가 말하는 예의범절이 아니라 성경이 명령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권면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어른을 공경하라고 요구하는가? 그에 대한 짧은 답은 ‘그렇다’이다. 조금 더 긴 설명을 위하여 먼저 기초 진리가 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묶인 우리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기초 진리: 우리는 언약의 공동체,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마땅한 행실에 관한 질문에 답을 찾고 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인지 먼저 바르게 정의해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사람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복음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딸들의 모임이다. 교회 구성원은 영적으로 혈연관계인 가족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 모두를 하나로 영원히 묶기 때문이다. 영적 가족으로서 그들은 모두 하나의 기업을 공유하고, 하나의 소망을 바라보고, 하나의 나라를 상속받고,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며, 그분께 둔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성령의 인치심과 능력을 힘입는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얻었고, 또 다른 비유로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은 언약 아래 교회는 한 가족,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세세토록 공유한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구약시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많은 영적 축복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아래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으로서 ‘가족’이라고 넓게 묶을 수 있었지만(공통 조상 아브라함, 그 후손들이 이룬 민족 이스라엘), 할례를 통하여 언약 아래 들어온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영적으로 한 언약의 공동체를 이루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누렸다. 하나님은 그 언약의 공동체가 따라야 할 계명을 율법의 형태로 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출 20:12). 공경의 대상은 육신의 부모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족 전체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계명이 주어진 것이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2)

센 머리”는 ‘백발’을 의미하고 이어지는 “노인”과 같은 부류의 대상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고집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했다. 하나님은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노인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나타내라고 명령하셨다. 그 구체적인 방식 중 하나가 “일어서”는 것이었다. 오늘날 동양 문화권에서도(심지어 서양 문화권에서도 발견된다!) 유사한 태도와 행실이 요구된다. 마땅히 공경해야 할 대상이 있으면 그/그녀를 공경하고 또 공경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인 ‘일어서는 것’을 통하여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인사는 어른을 공경하는 표현 방식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혹은 무례히 행하고 버릇없이 구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말씀이 뒤따르는 것을 주목하라. 언약의 백성이 영적 가족 관계 안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어른 공경은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었다.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이었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의 이름을 걸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푸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면서 그 복을 누리는 수단으로서 노인을 공경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거꾸로 뒤집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어른을 봐도 일어서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면, 그/그녀는 자기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로 간주할 수 있다.

주의 명령: 뭇 사람을 공경하라

두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첫째, 신약시대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에게도 같은 명령이 주어졌는가? 둘째, 아직 구원받지 않은 아이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언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들에게도 요구하는 것이 옳은가?

먼저,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남아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치라고 명령했다(딤전 3:15). 바울은 지체된 일정 때문에 디모데전서라는 편지를 통하여 대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에서 성도가 각각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그 모든 행실에 본이 되기를 바랐다. 디모데에게 바울은 노인을 각각 공경하라고 이렇게 명령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딤전 5:1-2)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를 바른 교훈으로 가르치고 권면해야 했던 디모데에게 바울은 어른 공경의 태도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보통 “늙은”에 해당하는 나이를 50세 이상, 더 넓게는 40세 이상으로 본다. 당시 수명을 고려할 때,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지만, 성경의 바른 교훈으로 성도를 지도하는 일을 할 때조차 대상이 어른이라면 충분히 공경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하듯”, “어머니에게 하듯”이라는 설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연결된다(막 7:10). 우리는 교회에서 나이든 성도를 대할 때, 십계명이 요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태도에 걸맞은 태도와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집), 교회라는 언약 공동체 안에서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분명한 뜻이다.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공경하고 또 합당한 태도와 방식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서로에게 표현해야 한다(벧전 2:17).

둘째, 아직 언약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녀에게 언약의 백성에게 요구된 명령을 따르라고 권할 수 있을까?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도 자녀가 태어나면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할례를 통하여 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참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아니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했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평생 여호와를 경외하며 언약의 복을 누릴 수 있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자연스럽게 언약의 참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를 왜 교회에 데리고 오는가? 왜 그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 사귀도록 요구하는가? 그들이 아직은 거듭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 평생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영생의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자녀에게 교회에서 어른을 공경할 것을 가르치라(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어른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라). 그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태도라는 것을 알게 하고 또 본을 보이라.

때로는 어른들이 본을 보이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도 친하고 편한 사람에게만 인사한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 미워하는 대상은 일부러 피하거나 인사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스스로 판단해 보라. 우리가 영원히 서로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영원히 한 가족이고, 영원히 교제할 언약 공동체가 아닌가? 지금은 잘 모르는 사이라도 결국엔 친밀한 영생의 사귐을 누리는 사이로 발전될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잘 몰라도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친절히 대하고 사랑과 공경을 담아 인사하자. 어른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사 문화에 어린이가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돕자.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좋은 본을 끼치는 모습이다. 친밀한 사이일수록 아이들은 공경하는 태도를 진심으로 담아 인사하며 다가오기가 쉬울 것이다.

요즘엔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점점 사라져가는 이웃 간의 정이 넘치는 문화를 되찾기 위하여 인사하는 운동을 한다고 한다(‘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서로 웃으며 인사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다).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유산을 함께 나누며 영원한 사귐을 누리는 교회는 세상과 분명 달라야 한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바로 옆집에 있는 이들과도 인사하지 않는 삭막한 세상에서 복음으로 맺어진 가족 간 나누는 뜨겁고 친절한 사랑을 세상이 보고 감탄하게 할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인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