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이 질문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은 것이다(눅 10:29). 그는 율법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예수님의 그의 대답이 ‘옳다’고 칭찬하시면서 매우 중요한 비밀, 그가 예수께 여쭈었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밝히셨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우리는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란 걸 알고 있다. 영생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죄인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주셔서 영원히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사귐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의지하는 자였다. 그래서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웃이 누구인지 알기만 하면 그들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그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자비를 베푼 자”가 자비를 얻은 자에게 있어 이웃이 된다는 사실을 보이셨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가…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되물으셨다. 자비를 경험한 적 없는 자기 의를 드높이는 율법교사는 자신이 정한 이웃에게만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호의를 베풀면 그만이란 생각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자비를 경험한 자,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가장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심지어 적대관계에 있는 자에게까지 자비를 베푼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를 행하는 자는 산다. 그리고 오직 은혜를 입은자만이 이를 행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어디까지 흘러가고 있는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거리 두기’를 오래 실천하면서 우리는 교제의 단절을 경험했다. “집 안에서 머물라”(“Stay at Home”), 이런 구호와 함께 직계가족(한 집에 거주하는) 중심으로 교제를 통제하고 사적 모임을 강력하게 규제하여 현재는 4인만 그것도 백신을 맞은 사람끼리만 모일 수 있게 했다. 거리 두기나 백신의 효용성을 논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이것이 위에서 말한 이웃 사랑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왔는지 생각해보자.
이미 수십 년 전 기독교 내부에서 교회가 점차 개인주의에 빠져든다는 경고가 있었다. 교회의 규모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교회는 나와 내 가족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지체가 서로 섬기도록 은사를 나눠주셨고 은사 곧 은혜의 선물을 통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은혜를 서로에게 흘러가도록 하셨다. 그런데 이제 교회가 묻는다. “내 지체가 누구니이까?”
우리는 받은 은혜로 인해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벧전 1:22). 그 은혜로 인해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직계가족이나 4인에게 제한적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다. 우리와 함께 형제자매로 한 몸을 이룬 교회의 지체들에게 흘러가야 한다. 옳게 보이려고 ‘내 형제가 누구니이까’라고 묻지 말고 자비를 얻은 자처럼 자비를 베푸는 자로 행하라. 나이나 정치 성향이나 성별이나 가치관이나 삶의 배경이나 성격이나 이런저런 이유를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런 사랑을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 합당하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한 성도가 나머지 지체를 다 돌아볼 수는 없다(목회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성도가 주께 받은 은혜와 자비를 몇몇 지체에게 흘려보낸다면, 한 몸을 이룬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리저리 흘러가며 풍성한 사랑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와 코로나바이러스가 심화시킨 나(혹은 내 가족) 중심적인 삶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막연한 기대를 담아 열심을 보여 혹시나 무언가를 얻을까 하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얻어내는 빈손(믿음의 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간구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성도의 필요와 사정을 기억하며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무궁한 은혜를 성도에게 베푸시고 또한 우리를 그 은혜의 통로로 삼아주신다(약 5:16).
우리는 성도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더 큰 곳간을 지어 풍성한 소출을 쌓아두고 여러 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려는 행위를 가리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책망하셨다(눅 12:16-21). 그러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곳간을 지을 수 없는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었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단지 우리 필요만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경제학보다는 소비문화에 더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단순한 규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내가 벌었으니 내 마음대로 쓸 자격이 있다. 그것은 내 것이다. 내 자신의 육체적인 안락함을 위해 쓰겠다”(존 파이퍼, <나의 목회자 형제들에게> (좋은씨앗, 2021), 256p)
바로 이런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 은사, 물질, 시간 등 주신 모든 은혜로운 선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물론 그 속엔 내게 맡겨주신 가정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도 들어 있다). 성도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보여주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이 당신께 맡긴 여러 은혜를 흘려보내라.
우리는 문안할 수 있다
성경엔 “문안하라”는 명령이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고전 16:20). 가볍게는 인사, 나아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진심 어린 격려와 권면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명령하는데(고후 13:11), 오늘날 실천하기 어려운 형식이긴 하지만 문안이 얼마나 친밀하고 정결하며 경건한 행위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 자매는 인사성이 없어’, ‘어떤 형제는 인사하는 걸 본 적이 없어’라는 불평을 여기저기서 자주 듣는다. 그만큼 친한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고 명하신다(빌 4:21). 단지 인사성 밝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같은 믿음, 같은 은혜, 같은 소망을 얻은 자가 험난한 세상을 살다가 만났을 때 서로에게 은혜로 문안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내가 인사해야 할 사람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지 말라.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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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의 친밀한 교제와 사귐의 문제는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에도 적신호를 보였다. 점점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세상과 그 세상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는 우리의 죄성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교회를 서비스를 얻기 위해 나와 내 가족이 선택한 하나의 서비스 기관처럼 여기면 안 된다. 나와 친밀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동아리 수준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 오심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 많은 성도에게 나아가 교회 밖 이웃에게까지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성도를 위해(갈 6:10) 기도하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서로 문안하자. 그러면 세상이 우리 이웃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베푼 자비를 통해서 무궁한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