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1: 옛 언약의 백성(이스라엘)

하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을 불러 모으실 때도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것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1-7)

요약하면 사방 곳곳에 세워진 우상을 제거하고 그런 방식의 예배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 가운데 택하신 곳(이름을 두시려고…택하신 곳) 그곳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지만, 장소의 제약을 받는 자기 백성에게는 특별한 장소를 지정하여 그곳에서 예배할 것을 요구하셨다.

너는 삼가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진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 12:13-14)

이스라엘의 모든 성년 남성은 필수적으로 매년 세 번(무교절, 칠칠절, 초막절) 그 특별한 예배의 장소에 가서 여호와께 제물로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었다(출 23:17; 34:23; 신 16:16; 신 15:20-“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모세는 “여호와께 보일지라”,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곧 언약에 신실하신 주권적인 사랑에 의해 연약한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입었다(신 7:7-9).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풍성하신 그 사랑을 출애굽이라는 극적인 구원의 사건을 통해 함께 경험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와 공급을 받음으로 함께 배웠다(신 8:3).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이 함께 경험하고 배운 하나님을 여러 가지 하나님이 정하신 예식과 절기를 통해 다시 경험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곳에 제한된 분이 결코 아니지만, 택하신 곳에서 그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와 방식을 통해 더욱더 자기 백성에게 자기 임재를 드러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은혜의 방편에서 멀어질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택을 기억하는 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다윗의 정권과 솔로몬 정권 초창기에 절정을 이룬 예배가 제국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급격하게 추락하게 된 이스라엘 역사에 반복적으로 ‘산당’ 문제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이 아닌 자기 편의에 따라 이방인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결국은 끔찍하다. 하나님을 섬기되 전심으로 섬기지 않는다. 하나님만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상을 함께 섬기게 된다.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사랑이나 선행이 독려 되기 보다는 불의와 악이 넘친다.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경험하고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서 멀어진 하나님 나라 백성은 힘을 잃는다.

 

CASE 2: 새 언약의 백성(교회)

자, 그럼 이제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새 언약의 백성을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교회가 예배의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의 장소는 제약이 없지만, 예배 자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의 제약을 받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이 모인 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신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제 예배가 구약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예배가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진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례는 이제 그 역할을 다했다.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배를 드린다. 히브리서 기자가 힘주어 강조한 것처럼 예수님이 더 좋은 제물, 더 좋은 제사장이시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백성을 옛 언약의 백성처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부르신다(벧전 2:9).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잇돌로 삼아 그 위에 세워진 신령한 집이 된 것이다(벧전 2:5). 새 언약의 백성 중에서도 하나님은 옛날처럼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있으시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 주목하라. 하나님은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곳에 모이라고 명령하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함께한 그곳을 “거하실 처소”로 삼으신다. 교회가 바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다. 교회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린 모든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함께 모인 그곳에서 특별한 은혜와 임재를 나타내신다. 이것은 교회가 서로 사랑할 때 나타나는 역사이기도 하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교회는 또한 “성령 안에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 성령님이 교회를 하나되게 하셨다(엡 4:3). 또한 성령님은 은혜의 선물(은사)을 각 성도에게 자기 뜻대로 나눠주셨다. 그 이유는 바로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7).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신 것이다(고전 12:25). 신약성경엔 그래서 교회가 함께 ‘서로’ 실천해야 할 명령이 무시할 수 없을만큼 많이 나온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서로 은사로 섬기게 하신 교회를 처소로 삼아 임재하시고 영광스러운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인 그곳을 택하여 자기 이름을 두셨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는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뵈옵고 그분이 정하신 방식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더 모이기를 힘쓰라고 명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이기를 폐하면 모임 중에 계신 미쁘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그분의 약속을 믿는 소망에서 우리가 점점 멀어진다.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을 하기 힘들다. 그럴 기회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져서 해야 할 일인데 그 능력의 원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으니 그러기 힘든 것이다.

모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 모임 중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뵈옵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을 함께 알아가고 그 은혜를 함께 경험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입는 일에서 멀어지면 어떤 피해를 보는지 옛 언약의 백성을 통해 충분히 배우지 않았는가? 장기간의 ‘온라인’ 예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분명한 교훈이 있다. ‘온라인’으로는 우리가 함께 모일 때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충분히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함께 모이자.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모니터로 맛보지 말고 직접 와서 맛보아 알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