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처음 확인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는 2021년 9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크고 중한 재앙을 오래 일으키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 및 손해를 끼치고 있는 코로나는 단지 물질적, 정신적 피해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필요의 결핍 나아가 영적 필요의 공급 부족 현상을 낳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가 ‘위드 코로나’라는 새로운 대응책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는데, 독감처럼 코로나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그냥 놔두면서 대응하는 방식으로 방침을 수정할 가능성을 비친 것이다. 실제로 유럽의 몇몇 국가는 ‘위드 코로나’와 유사한 방식을 백신 보급과 함께 이미 시행했다.

한편 교회는 그동안 정부의 코로나 방역 방침에 준하여 여러 가지 필수 활동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정기집회 외에는 모이지 않고, 성가대는 쉬었고, 수련회, 수양회, 특별집회 등도 모두 취소했다. 구역집회도 멈췄고, 성경 공부는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코로나와 함께 교회 주방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교회학교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상황에 따라 바꿔가면서 구성원과 교사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억제’ 정책을 탈피하여 ‘함께’ 정책으로 전환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협하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인 것은 사실이지만, 건강을 위해 필수 활동을 억제할 때 다른 영역에 손실이 늘어난다. 가령 교육부가 학생들에게 전원 등교를 요청하는 건 장기간 온라인 수업이 그들의 교육을 방해하고 그 피해가 건강만큼 위협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회도 그렇다. 가장 먼저는 성도의 건강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유로 억제한 여러 필수 활동의 부재로 발생하는 손해를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교회의 필수 활동 중 하나는 교제이다. 성도가 삶을 나누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우리가 함께 자라게 하신다. 채팅, 전화, 영상 통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지만, 직접 만나 나누는 친밀한 교제와 비교할 때 현격히 질이 떨어진다. 장기간 온라인 교제를 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피해를 본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코이노니아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함께’ 정책으로 전환될 미래를 위해 교회가 힘써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위드 코로나’ 정책이 시행되면 우리는 무엇을 더 신경 써서 회복해야 할까?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으려면 현재 우리가 ‘억제’하면서 입고 있는 피해가 어디서 발생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생긴다. ‘위드 코로나’ 정책이 올해 말 혹은 내년 어느 시점에 시행될지 모르지만, 코로나 억제 정책을 따르면서 우리가 감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하나하나 점검하다 보면 우리는 정책의 전환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먼저 코로나에 합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일종의 ‘신앙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단 모여야 한다

코로나는 여러 ‘모임’을 폐하게 만들었다. 학생이 학교에 모이는 것을 막았고, 회사원이 회사에 모이는 것을 금했다.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과 경제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손실이 생기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되려 학생이 학교에 가는 것을 지나친 요구처럼 여기고, 회사원은 혹시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재택근무가 가능한 회사로 옮기고 싶다고 말한다. ‘온택트’라는 말이 생겼는데, 온라인으로 콘택트하는 것도 ‘만남’ 혹은 ‘모임’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모이지 않아도 적당히 학교나 회사가 잘 굴러간다면, 왜 힘들게 모여야 하나?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보다 못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설교자의 설교를 눈으로 보는 것과 화면으로 보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현장에서 함께 찬양하는 것과 집에서 화면을 보며 따라 부르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예배를 마치고 5분이라도 현장에 모인 성도와 삶을 나누고 눈인사를 나누는 것과 화면을 끄면 예배가 종료되는 것은 너무 큰 격차가 있다. 이렇게 분명한 차이를 매주 또 매번 경험하면서도 학교 가기 싫어하는 학생이나 회사 가기 싫어하는 직장인처럼 교회 현장에 나오기 싫어하는 성도가 코로나 이후 적지 않게 생길 것이란 전망이 있다. ‘온택트’가 가능한데 왜 콘택트 해야 되냐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조금의 손해가 있더라도 성도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 되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히 10:25).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오히려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명령은 모이지 않고서 순종하기 힘든 명령이다(히 10:24). 또한 간헐적으로 모이는 이들에게서 히브리서 기자가 명령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는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히 10:23). 반대다. 신실하게 모이는 데 실패하는 성도에게서 어김없이 보이는 손실은 그들이 믿는 도리의 소망에서 움직인다는 것, 느슨하게 신앙을 쥐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성도를 돌아보는 일이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 컨설팅 관련 서적에서 코로나 이후에도 현장과 온라인 예배를 병행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는 목발과 같다. 다리를 다쳐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을 때 도움이 되는 임시 도구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성도가 온라인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 감사한 일이지만, 모일 수 있는데도 온라인 예배가 가능하기 때문에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우려했던 문제가 고스란히 성도의 삶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한때 모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성도가 모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나중엔 모이는 것이 귀찮고 피곤하고 꺼려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생각이 그렇게 전환되는 동안 영적으로는 믿음에서 멀어지고 하늘이 아니라 땅에 소망을 두기 시작하며 자기 자신과 가족만 사랑하는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단순히 교회 ‘출석’이 어떤 사람의 영적 성숙도와 주님 닮은 성품을 모두 대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모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다음 칼럼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