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 불확실한 세상을 살고 있다. 건강, 재정, 인간관계, 직장, 안전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 불안 요소는 수없이 존재하며, 세상 사람은 이를 운에 맡기고 모든 것이 좋은 상태인 ‘복’을 빈다.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과 달리 하나님께 맡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이미 약속하셨다(롬 8:28).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종류의 불안과 염려를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하나님 믿는 자가 끊임없이 확신을 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 쉽게 말하면 구원의 확신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매주 교회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 열심히 봉사하지만, 천국에 갈 확신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죽어봐야 안다고 말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소위 모태신앙인은 복음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을 혼동하며 계속해서 안심과 불안 상태를 오간다. 구원의 확신을 다룬 책에서는 그래서 첫째, 확신이 우리 생각과 감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에서 오는 것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둘째, 자기 삶의 공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고 권면한다.

구원에 관하여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옛 본성의 문제다. 참 신자의 구원은 ‘믿음’이 요구되지만, 그 ‘믿음’을 포함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확신 또한 자기 믿음의 강도나 열심, 복음 교리를 아는 수준에서 찾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의”, 그 은혜의 보고 안에서 찾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이 칼럼에서 다루려는 확신의 자기 중심성 문제는 신자가 확신을 얻기 원하는 영역에 있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다. 우리가 얻기 원하는 확신은 나의 안위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 지옥을 면할 것인지 온통 거기에만 관심을 둔다.

사도 바울의 확신
바울의 확신은 이기적인 확신이 아니었다. 자기 안위에 관한 확신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 말씀은 잘못 해석하면 바울이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편지의 시작부터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확신한다(고전 1:1). 또한 편지의 수신자들 곧 “남에게 전파한 후에”에 해당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를 가리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렀다(고전 1:2). 바울은 자신과 그들의 영적 안위를 불신하지 않았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불가항력적인 은혜, 일방적인 부르심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있었다.

단지 바울이 추구한 확신이 이기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바울의 얻기 원한 확신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바울은 자신의 삶이 완벽했고 그래서 상 받을만했다고 교만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위의 고백은 자신의 떠날 날이 가까움을 아는 상태에서 매우 강력한 확신에 차 있는 고백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확신이 단지 자신의 안위, 내가 구원받은 것일까 아닐까,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나 없나, 혹시 지옥에 가는 건 아닌가 등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생각보다 많은 신자가 이런 이기적인 확신에 그친다. 구원을 받은 것 같아서 지옥은 면한 것 같고 천국에 갈 확률이 높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걸로 족하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확신은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는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자기에게 주실 의의 면류관에 확신을 갖기 위해 살았다. 어떻게 하면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더 존귀함을 얻을 수 있을까(빌 1:20), 어떻게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을까(고전 10:31),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주가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행 20:24). 이것이 바울이 얻기 원한 확신의 영역이었다.

적용
구원의 결과로 신자가 얻은 건 영생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이다(요 17:3). 사도 요한은 이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는 것이라고 했다(요일 1:3). 그런데 신자가 항상 확인하고 싶은 것이 ‘과연 내가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건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게 맞나?’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아주 초보적인 믿음과 얄퍅한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사랑의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어떻게 그리스도와 더욱 동행할 수 있나?’를 묻고 추구하는 자는 바울처럼 풍성한 사귐의 기쁨 안에서 굳센 믿음으로 상 주시는 이와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확신을 얻기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자기 안위에 대한 것만 끊임없이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하루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라. 창세전에 당신을 택하고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지극히 크고 풍성하심 속에서 당신의 모든 불안과 의심을 내어버리라.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바울처럼 한 가지 확신을 추구하며 살라. 어제보다 오늘 더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되는 것, 어제처럼 오늘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오늘 달려갈 길을 마치며 의의 면류관을 주실 주님을 만날 그날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삶을 살라. 사람은 가장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자기 공로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은혜의 선물 구원에 관한 것도 이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칭의’, ‘성화’, ‘영화’에 관한 오용도 신자의 삶에 직격탄을 날리지만 ‘확신’ 또한 은혜와 믿음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확신’이며, 그런 이기적이지 않은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은혜의 복음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