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불변의 하나님, 영원의 위로 1

본문: 시편 102편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경험이나 실천 이전에 지적이며 이론적인 것을 말한다. 사실 ‘지식’이나 ‘이론’ 같은 말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환영받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실천과 적용을 더 좋아한다. “왜” 보다는 “그래서 어떻게”를 더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결과는 빨리 만들어 내는데, 기초는 부실할 때가 많다. 기초가 부실해도 겉보기에는 별로 달라보이지 않으니, 굳이 기초에 힘쓰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 혹은 고지식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부실한 기초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 때가 있다.

건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알면서 그게 아는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렇게 신앙의 기초를 부실하게 세워두고 ‘그래서 어떻게’ 살지만 고민한다. 어쩌면 그런 삶이 어느 때는 뭔가 더 열매도 있고 더 성숙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을 흔드는 일을 만났을 때 그 본 모습이 드러난다. 기초가 없는 신앙은 굳게 서지 못한다. 파도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처럼 그 신앙이, 그 삶이 무너져 내린다.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은 알지 못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당연히 경험적이고 실천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성경의 표현들을 깊이 고민해야봐야 한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되는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다양하게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그렇게 잘 놓여진 신앙의 기초가 있을 때 우리는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성경 전체가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지만, 시편은 특히나 좋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시편 저자들의 슬픔과 기쁨, 탄식과 찬양, 기도와 감사 등을 통해서 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도 그렇다. 시편 102편의 표제는 매우 독특하게도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고 되어 있다. 저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배경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저자가 어떤 상태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는 알 수 있다. 그는 고난을 당해서 마음이 상했다. 마음이 괴로왔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이 시편의 기도로 쏟아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들이 많다. 다른 시편, 욥기,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등에서 볼 수 있는 표현들이 시편 102편 곳곳에 묻어 있는 것이다. 즉 이 기도는 성경을 통해 배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기초한 기도다. 단순히 성경을 인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배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고난 당해 마음이 상한 그에게 실제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볼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특별히 시편 102편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심이 어떻게 오늘의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본문은 자연스럽게 3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1-11절은 시편 기자의 탄식이며 12-22절은 하나님의 위로다. 그리고 마지막 23-28절은 시편 기자의 기도다. 이 중 오늘은 1-11절의 순간의 탄식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자.

순간의 탄식(1-11절)

여기서의 순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비해 순간을 사는 우리를 말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영원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특히 어린 나이에는 자신이 ‘순간’이라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는해도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 적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육체의 한계를 더 경험하게 되면 조금씩 생각이 달라진다. 병원에 가는 일이 늘고, 장례식에 가는 일이 늘어나면 더욱 그렇다. 때로는 특별한 계기를 통해 더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가까운 가족에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나거나 혹 자신이 큰 일을 경험하게 될 때 그렇다. 아마 여기 시편 기자가 그랬던 것 같다.

먼저 1-2절에서 시편 기자는 우리가 탄식의 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102:1–2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얼굴을 숨기지 말아달라는 것이나 귀를 내게 기울여 달라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구하는 표현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 괴로운 상황에 있지만,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고 귀를 막고 그 상황을 외면하고 계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또한 하나님은 그런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글로, 말로, 노래로 그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음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출 2:23).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앞뒤 문맥을 보면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단지 현실이 고통스러워서 탄식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그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다.

사사 입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 민족의 손에 괴롭힘을 당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너희가 부르짖었을 때 여러번 너희를 구원했지만 너희가 여전히 나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니,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택한 우상에게 구원해달라고 구하라고도 하셨었다(삿 10:6-14).

참 흥미로운 상황이다. 하나님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받아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백성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명백해 거부하시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 이어지는 말씀은 더 흥미롭다.

10:15–1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당당히 요구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하십시오. 다만 우리는 이제 이방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부르짖겠습니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하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과 그들의 고통을 보시며 하나님은 근심하셨고, 결국 하나님은 입다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고통 중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보신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하나님은 자녀를 낳지 못하던 한나의 괴로움을 보시고 그녀에게 자녀를 주셨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그를 살게 하셨다. 사르밧의 과부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셨고 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기도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보신 일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다윗도

145: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여기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있어 성경 속의 이야기는 그저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이고 단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래서 그는 탄식 중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다 알지 못했겠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심을 증명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100원 짜리나 200원 짜리 물건을 샀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산 물건을 버리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100원은 길 가다가 눈에 보여도 귀찮아서 줍지도 않을 정도의 돈이 되었다. 하지만 수백 수천 만원을 들여서 산 물건이라면 어떨까? 더 가치있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지불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찾아오셨는지를 안다면, 절대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관심 하시고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표현한다(행 20:28). 하나님께서 우리를 얻기위해 지불하신 가치는 무한하다. 따라서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외면하실 이유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임을 알기에 시편 기자는 자신의 괴로운 날에 부르짖었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불평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특히 시편 기자는 “속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를 구했다. 사실 기도할 때 “하나님, 제가 기도하긴 하지만 급한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 기도 다 들어주시고 시간 나면 그 때 들어주셔도 괜찮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일이라면 기도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속히”는 시간의 급박함 뿐 아니라 간절함의 표현이다. 단순히 참을성이 없어서 지금 당장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더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102:3–5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라고 말했는데, 여기 시편 기자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날이 마치 불 가운데 던져져서 연기와 같이 소멸하는 나뭇조각과 같다고 비유한다(3절). 4절에서 말하는 풀과 같이 마르고 속히 사라지는 이미지는 시편 37:2와 이사야 40:7에서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특히 자기 마음이 그렇다고 한다. 음식을 먹기도 잊을 정도로 지금의 상황을 버텨낼 힘도 의지도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이 질병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8절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원수들로 인한 것이든, 사람이 이런 괴로운 상황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지하는 계획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효과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면 점차 의지를 잃어간다. 어차피 해도 안될거라는 생각이 커지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슬픔과 좌절에 압도된다. 그러다 보면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일들조차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한다. 육체적으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지만 마음이 그렇데 될 때가 많다. 지금 시편 기자가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살이 뼈에 붙을 정도로 수척해졌다(5절).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힘을 잃고 연약해진 상태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번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새에 비유한다.

102:6–7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여기 올빼미와 부엉이는 오늘날 그 이름으로 부르는 새 종류는 아닐 수도 있다. 영어 성경은 올빼미를 펠리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올빼미와 부엉이는 혼자서 생활하는 야행성 조류의 대표적인 종류일 것이다. 7절에서 나오는 “참새”라는 표현도 우리가 아는 참새보다는 일반적인 새를 의미한다. 즉, 공통적으로 여기 언급된 새들은 광야에 있듯, 황폐한 곳에 있든, 혹은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해도 지붕 위에 있는 외로운 새들이고 또한 밤에 자지 않는 새들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외로울 뿐 아니라 밤에 쉽게 잠들 수도 없는 그런 상태를 새에 비유해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는 상태는 두 종류가 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와 잠을 자면 안되는 경우다. 새에 비유한 것을 보면 후자인 것 같다. 아마도 8절에서 언급되는 원수들 때문에 맘 편히 잘 수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102:8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원수들은 시편 기자를 비방하고 대항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 삶의 전부인 것처럼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맹세하고 시편 기자를 대적할 정도였다. 누군가는 이런 일들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고 그리고 실제로 무시하면 그만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유일한 출구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기도 한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원수들의 비방과 대항이 있을 때 시편 기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외적으로 내적으로 연약한 상태이기도 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유일한 음식과 음료는 재와 눈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102:9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재를 뒤집어 쓸 이유가 없지만, 성경 시대에는 큰 슬픔 가운데 있을 때 그렇게 했다. 원수들의 적극적인 공세에 대해서도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슬퍼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마저도 그를 돕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가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고 계신 것처럼 보일 정도다.

102:10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시편 기자는 실제로 자신의 어떤 죄가 이런 상황을 야기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편 기자도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죄에 대한 회개의 내용이 있을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런 고난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상태로 자신을 계속해서 두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바람에 겨를 날려보내 듯, 나를 들어서 던지셨다. 이 표현도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묘사하면서 사용했던 표현과 유사하다(욥 30:22).

답을 알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끝으로 다시 한번 자신이 순간을 사는 나약한 존재임을 언급하며 탄식을 마무리한다.

102: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이 말은 다시 3절로 이어지고 1-2절의 부르짖음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나는 곧 사라질 존재이니, 속히 나를 구해달라는 소리 없는 부르짖음인 것이다.

도전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탄식할 일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처럼 탄식하는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탄식하는지가 중요하다.

때로는 정말로 우리가 ‘순간만’ 사는 사람처럼 탄식할 때도 있다.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탄식하는 것이다. 순간만 사는 사람이라면 질병이 좋은 일이 될 수 없다. 고난 중에 기뻐할 이유가 없다.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일들이 정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일이라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이득이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특히나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계속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슬픔 가운데 혹은 불평 가운데 살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약 고난 중에 이렇게 반응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그 지식은 사실 지식이 아니다. 나 혼자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로 다르게 탄식하게 한다. 순간만 사는 사람의 탄식은 방금 살펴본 말씀에서 1-2절이 없다. 1-2절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순간을 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순간을 살 뿐 임을 깨닫고 알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고난 중에서 얻는 위로가 다르다. 순간만 사는 사람이라면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위로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의 위로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온다. 바로 영원의 위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날은 기울어지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지만, 그 그림자를 지우는 햇빛인 하나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서 참된 위로를 얻었다.

그 위로는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는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이 땅에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앞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한 사람들의 예가 성경에 셀 수 없이 많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반대의 예도 충분히 많다. 하나님께 구했지만 원하는 구원하심을 경험하지 못했던 경우다. 그런 것들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없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편의 많은 탄식의 시편이 그 증거다. 신약에 와서 사도들의 삶이 그 증거이며 또한 순교자들의 삶이 그 증거다. 당장 우리의 삶을 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자들의 삶이 항상 평탄하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말 뭔가 숨겨진 죄가 있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의 괴로움을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허락하기도 하신다. 욥에게 그렇게 하셨고 여기 시편 기자에게도 그렇게 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뿌리를 내리고 반응해야 한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특히 질병에 관해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이나 혹은 다른 비슷한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영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 하지만 그것은 전혀 영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세속화된 생각의 증거일 뿐이다. …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은 건강을 포함한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은 치유하실 수 있고 치유하시지만, 신유를 믿는 자들이 주장하는 만큼 자주 치유하지 않으시며 혹은 요청할 때만 치유하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플 때 하나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완전한 건강은 권리가 아니며, 또한 질병은 완전한 건강만큼이나 하나님의 선물이다.” – Boice, 828.

질병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순간만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 땅에서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나쁜 것’을 우리 삶에 두신다.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탄식할 수 있다. 그 탄식은 거짓 탄식이 아니다. 순간의 존재인 우리에게서 나오는 진짜 탄식이다. 진짜 고통이고 슬픔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서 제거되기를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는 자로서 탄식해야 한다.

그 좋은 예를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한 고통이 그에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바울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그것이 없는 것이 그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이었다.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바울의 기도대로 응답하시기를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은 “그래도 좀 참아봐라”, “나중에 더 좋은 걸로 줄게”와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다만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의미가 있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고, 그러니 이것이 충분한 은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 바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지고 하나님을 원망했는가. 그렇지 않다.

고후 12:9–10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연약함’이 아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고난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내 삶에서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자신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사람의 고난에 대한 반응이다.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괜찮은 것이다. 오히려 고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가 이러한지 점검해 봐야 한다. 고난에는 불평만 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그렇게 한다. 우리의 간증이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땅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시선은 분명 달라야 한다. 우리의 탄식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합당한 탄식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 속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우리의 삶이 이 어둔 세상 속에서 빛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