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2장 6-16절

설교자: 조정의

*기술적인 문제로 설교 영상은 녹화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 지혜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바울은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비교하며 설득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때, 그리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바울이 그들 중에 전할 때도, 세상 지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고 열정적으로 논증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본문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지혜 자체로 향하게 한다. ①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무엇이 특별한가?(특징). ②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알리셨는가?(계시). ③ 누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가?(적용).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그래서 무엇을 판단하거나 분별할 때는 항상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균열은 항상 서로 다른 기준(하나님의 지혜와 섞인 세상의 지혜)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내는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지혜가 되기를, 그렇게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란다.

1.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6-9절)

‘나’에서 우리로 주어가 바뀐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의 개인 경험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 전하는 자들이 공통으로 전달한 지혜의 근원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6절). 한편, 그 지혜를 전달받은 대상으로 언급된 “온전한(장성한) 자들”이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같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3:1). 바울은 지금 오직 영적으로 장성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지혜를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어린 아이들 같은 성도들을 가리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탄식했다(고전 3:3). 하지만 신자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다(정체성). 그러나 그들의 삶이 신분과 명백히 동떨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한 것이다(3절).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성도는 온전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지혜를 모두 듣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첫째,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성격이 다르다(6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 있듯, 하나님의 지혜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널리 발견되고 통용된다(공식, 이론, 법칙, 원칙). 세상 통치자들(학자, 변론가 포함)의 지혜 역시 모두 다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지혜는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하는 일을 거스른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를 온 세상에 가득 채우셨지만,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풍조를 일으켜 그 모든 지혜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의 지혜도 이 땅에서 잠시 이용될 뿐, 곧 폐기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모든 지식(인)이 유기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감추어졌던 것이다(7절). ‘비밀’, ‘신비’를 뜻하는 은밀함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가 가진 특성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벽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의 지혜나 연구, 노력과 분석으로 절대 얻어낼 수 없다. 바울은 이 지혜가 분명히 우리에겐 감추어졌던 것(완료형)이지만, 하나님께는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밝혔다(7절, 엡 1:5). 바울은 여기서 모든 종류의 지혜를 다루기보다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관한 하나님 지혜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고, 감추어두었다가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믿는 자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가져다준다(하나님을 사랑하는…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7절).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 최고의 성경(율법)학자, 영적 지도자, 철학자와 변론가, 그 누구도 이 지혜알지 못하였다(8절). 단 한 사람도. 그들의 무지함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으로 확실히 입증됐다. 또한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절).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사 64:4; 65:17), 사람이 인식하고 사고하는 필수 기관인 눈, 귀, 마음(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절대로 알 수 없다.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거나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복음을 알게 됐나?

2.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10-13절)

하나님의 깊은 마음에 은밀히 감추어졌던 복음의 지혜와 그 능력은 믿는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졌다. 어떻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나님의 한 위격으로하나님의 영,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도 한다(11, 12절, 일체 & 위격의 구분). 16절에서는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모두 우리에게 복음의 지혜를 알리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에 하나 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감추신 마음속 깊은 곳의 지혜를 알고 계실까?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아신다. 바울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11절). 맞는 말 아닌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11절).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10절, ‘살피다’).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11절),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분에게 감춰진 지혜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로운 것들을 알기 위해 세상적인 관점(세상의 영)이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12-13절). 사도 요한도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바울은 당시 관용했던 원리를 이용하여 이렇게 요약했다: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로 크게 오해할 소지가 있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음의 지혜를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크게 잘못 분별하고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첫째,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니 사람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성도에게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은사를 주시고, 누가 교회에 교사를 은사로 주시는가? 성령님이다(고전 12:8, 28).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고 가르치실 때 사람을 세워 사용하신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인 하나님 말씀을 분별할 때 영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기록하실 때 사용하신 일반적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신비로운 깨달음과 본문이 의도한 바와 아무런 상관없이 얻은 즉흥적인 교훈을 영적인 이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실 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다(요 14:26).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요 16:13). 주관적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나타나는 뜻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미리 정해진 뜻을 가르쳐 주신다.

둘째, 어떤 이들은 스콜라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져 탁월한 지적 능력과 풍부한 학문을 가진 소수가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적 탐구와 이성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곧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게 됐다(12절).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은 필요 없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알 수 없을까? 성경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책이라면 올바른 해석법을 통해 누구나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일 곧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은 오직 영적인 사람만 분별하고 받을 수 있다는 진리다.

3. 하나님의 지혜의 적용(14-16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14절).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는다. ‘받다’의 의미는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수용하다’ 등인데, 현재형 동사는 성령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를 육에 속한 사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가? 설교나 성경의 메시지를 왜 받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오랜 시간 배우고 나서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뭔지는 알겠다. 그런데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 이유가 뭘까? 첫째,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에게 거리끼고 이방인에게 미련하게 보였던 것처럼 지금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어 보인다. 둘째, 오직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만이(신령한 자, 15절) 성령이 나타내신 일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육적인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의 참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여 어리석게 여기고 그래서 결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나타내는 하나님 지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알아보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안에 성령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다. 신령한 자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다.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16절, 사 40:13),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그분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또 하시는지), 나아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치에 동의하고 그 가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15절). 세상 사람이나 세상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이들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보배롭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 혹은 자녀의 구원을 점검할 때, 복음 교리를 얼마큼 많이 또는 자세히 알고 있는지, 그 가르침에 얼마큼 지적으로 동의하는지(그것도 진심으로) 따질 때가 많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하느냐이다. 얼마나 보배롭게 여기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 그것을 얼마나 경이롭게 여기며 겸손히 받아들이는가? 나의 옛본성이나 세상의 가치 기준에 비춰볼 때, 순간 어리석어 보여도,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실 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깊고 풍성하며 보배로운지 보고 그 지혜 앞에 굴복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가? 

당신은 언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의 모임이다. 분열은 영적인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려면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같은 분별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가르치실 때 겸손하게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함께 영적으로 견고하게 지어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