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 사랑을 아는 자는 어떤 사랑을 나눌까?

본문 : 요한일서 4장 7절~21절

설교자 : 조 정 의

성경에서 ‘사랑 장’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고린도전서 13장을 꼽는다. 하지만 ‘사랑’이 언급된 횟수를 고려하면 오늘 본문이 진짜 ‘사랑 장’이다(15구절, 27번 언급). 

본문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진짜 사랑의 출처를 밝힌다. 바로 참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많은 유행가가 사랑을 노래하고, 많은 시인과 작가가 사랑을 그려내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감정 중심적인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영원히 만족시킬 참 사랑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어떻게?

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은 그분을 보니 은혜(신적 사랑)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고백했다(요 1:14).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참 진리 그리고 참 사랑을 아는 자다. 

그런데 본문은 참 사랑을 아는 자마다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서로 사랑).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참 사랑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준이다. 또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의 사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방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이 나누는 사랑의 진실함을 검증하여 주시길 구한다.

1. 참 사랑의 출처(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는 주가 사랑하신 그리고 장로로서 자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르며, 사랑을 권면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우리가 서로 실천해야 할 일이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현재형)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요일 2:7-11; 3:13-24). 21절을 보면 요한은 이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께 받았다고 말했다(요 13:34; 15:12).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정의하는 ‘사랑’과 다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물론 모든 종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맞다(일반은혜에 따른 자녀 사랑, 부부 사랑, 불쌍한 이웃 사랑 등).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참 사랑에 주목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고(거듭나고), 하나님과 친밀한 앎, 친밀한 사귐을 누리는 자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랑, 곧 하나님께 속한 참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절). 하나님은 사랑이신데(본성), 하나님께 속한 그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이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예전부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호스가 수도에서 끊어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나름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서 유독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래 참지 못한다. 쉽게 화내고 거칠게 말하며 배려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만 구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이 봐도 사랑 없는 자로 보인다. 이들을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 사귐이 있는 자로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2. 참 사랑의 시작(9-11절)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곧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한다(9절). 여기서 첫째, 우리가  받은 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둘째, 우리가 서로 나눌 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의 크기를 헤아려 보자. 9절과 10절은 유사한 내용을 두 번 진술하는 것 같지만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절).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을 말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뿐인 자녀를 희생시킬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일반은혜로 우리는 부모 사랑의 크기를 안다. 그래서 자녀를 내어준 사랑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정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후 요한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시작을 바라본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10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열렬히 그분을 사모하고 찾아서 그 대가로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원수, 죄인이었다(롬 5:10).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수로 행하던 그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엡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의인도 선인도 아니고, 원수를 위해 자기 독자를 죽기까지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롬 5:7-8).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엡 2:1),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를 영원히 회복시켜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 우리가 계속해서 받고 있는 참 사랑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누리는 사귐의 시작은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누릴 영생의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시작하신 그 참 사랑을 영원히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면 두 번째로 우리는 서로 어떤 사랑을 나눠야 할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요구하셨다(요 13:34).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사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다른 이의 필요를 보고, 먼저 찾아가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을 해야 한다(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은 우리 안에 부어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특히 형제자매)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사귐을 갖는 자에게 마땅하다.

3. 참 사랑의 성취(12-18절)

어떤 이들은 당위성만 가지고 설득이 안 된다. 그들에겐 보상(약속)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참 사랑은 신자의 의무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런 축복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12절)

12절은 요한복음 1장 18절을 차용한 것 같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하나님을 누가 어떻게 나타내는가? 요한이 말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 사랑, 하나님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관계 안에서 온전히—완벽하게가 아니라 계속해서 성취됨으로—나타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둘째,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게 하신다(13절)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알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13절에 말하는 것처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완료형)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 5:22).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랑을 맺으면 맺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으로 보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더욱 확신한다(엡 1:13; 4:30).

셋째,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임을 증명한다(14-16절)

14-15절은 사도 요한을 비롯한 증인들이 보고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말했다(14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서로 사귐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사도들의 증언, 가르침을 믿고 시인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5절).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사도들이 보고 증언한 세상의 구원자, 통치자,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지 않으면 엉뚱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사도가 증언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이 참된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단순히 바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그의 믿음이 정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인 것을 무엇이 확증하는가?(약 2:26)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절). 참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 안에 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참 진리뿐만 아니라 참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를 향한 자기 믿음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믿음인지 산 믿음인지 알고 싶어 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참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이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넷째,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한다(17-18절)

모든 것을 환하게 아시고(심지어 속마음까지) 내 입에서 나온 말과 행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신 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가?

만일 두렵다면 그것은 형벌 때문이다.“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18절). 그러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3:18).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 장부에 적힌 모든 죄의 빚을 해결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참 증거가 서로 사랑임을 앞에서 살펴봤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절).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셨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셨기 때문이다(요 15:10). 우리도 그러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 날에 오히려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18절).

4. 참 사랑의 적용(19-21절)

서로 사랑할 때 이처럼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며, 우리 믿음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심판 날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된다.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해야 한다. 먼저 잊지 말라. 우리 사랑의 출처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절).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 모두 참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공급받는 힘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은 쉬운데, 성도 사랑은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돌직구를 던진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거짓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절). 칼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할 때 그것은 거짓 자랑이다”라고 말했다(좁스, 233p).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더 쉬운 것을 못 하면서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사칙연산 못 하면서 미적분 풀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21절).  그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예수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45).

몇 가지 구체적인 적용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빌 2:4)

세상은 갈수록 지독한 개인주의로 변해간다. 말세의 특징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딤후 3:2).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자기희생 그리고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라.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들의 유익도 추구하라.

둘째,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첫째가 ‘주는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는 ‘구원하는 사랑’, ‘보호하는 사랑’이다. 성도가 주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세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면, 진리를 점점 떠나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보호하고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인처럼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불평할 수 없다. 

셋째, 날마다 참 사랑을 채우라(요일 3:1-2)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힘은 참 사랑을 알고 거하는 데서 나온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자만이, 그 사랑으로 채워져 성도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사랑을 채우라.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