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구를 위하여 종은 사는가?

본문: 로마서 6장 15~23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제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출처입니다.

한 아버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아들을 훈계하려고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 매를 맞아야겠다. 그렇게 매를 대려고 하는데 울면서 용서를 비는 아들을 보니까 차마 때리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아들 대신에 자신의 발을 때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방에 있던 아들이 큰 목소리로 아빠를 부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하고 가봤더니 아들이 엄마에게 혼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회초리를 들고 아들을 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빠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대신 맞아주세요! 아버지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들 앞에서 일관성 있게 행동해야 되니까 결혼 후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맞았다고 합니다.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이 아들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그렇게 감동이 되고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났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야기가 익숙해지고 은혜에 적응하다보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죄를 가볍게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생각, 그런 태도와 삶의 방식을 경고하며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그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지난 주 말씀을 복습하는 것처럼 같은 주제가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작부터 아주 비슷합니다.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얼마나 비슷한지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먼저 짧은 외침이 나옵니다. 1절에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15절은 그런즉 어찌하리요 그리고 은혜와 죄에 관한 질문이 나옵니다. 1절에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15절은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다음으로 그에 대한 단호한 대답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죄를 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가치 있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의 삶은 방탕이나 방종이 아니라 순종과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원리를 알려주는데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연합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연합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여기고,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원리, 그 핵심은 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종에 관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원리와 적용, 그리고 명령입니다. 

1. 원리(16절)

먼저,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알아야 하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순종하는 대상에게 종이 된다. 줄여서 간단하게 하면 순대입니다. 순종하는 대상에게 종이 됩니다. 혹시 순대를 보거나 먹을 때가 있으면 그 때마다 이 원리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순종하는 대상에게 종이 되는데, 난 누구에게 순종하고 있나?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대상에게, 다시 말해 자신이 섬기는 대상에게 종이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될 수 있지만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는 순종하는 대상이 있고 그 순종을 통해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원리를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내가 왜 종이냐고!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니까 이 원리를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철저히 속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의존적인 존재로 모두 무언가에 속해있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질문은 섬기냐 안 섬기냐가 아니라 무엇을 섬기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권력을 구하는 사람은 권력의 지배를 받아 권력의 종이 되고 명예를 구하는 사람은 명예의 지배를 받아 명예의 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의 종이 되고 어떤 사람은 쾌락의 종이 됩니다.

다시 강조하면, 나는 나의 자유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종이 될 것인가? 이것이 질문입니다. 오늘 제목으로 하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내 욕심을 위해 사는 종이 될 것인가? 죄를 위해, 썩어 없어질 것들을 위해 세상에 속한 것들의 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 것인가?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6:24). 양다리 걸친 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가 그러합니다. 순종하는 대상에게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선택해서 죄에 순종하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속한 종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과 연합된 자로서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종으로 삽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지만 율법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혜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죄에게 우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죄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적용(17~18; 20~23절)

이렇게 죄와 은혜에 대한 질문을 순대의 원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이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따라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원리, 다음으로 적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원리를 적용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어서 우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주목합니다. 이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원리를 적용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적용은 주인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1) 주인이 바뀌었다(17~18절)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으며 죄가 원하는 것을 따라 하며 죄에 붙잡혀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가 그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했고 그 결과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전에는 죄가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의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죄의 종이라는 표현과 대조가 되는 세 가지 표현을 쓰는데 16절에는 순종의 종 18절에는 의에게 종 22절에는 하나님께 종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가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는 것을 말하는데 모두 하나님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양한 것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따르고 섬기는 것들로 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정리를 하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주인이 되는 것은 죄 또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믿었고 그 결과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섬기는 주인이 죄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주인이 바뀐 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신분의 변화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우리의 신분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인이 바뀌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또 다른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말하는 포인트는 신분의 변화가 아닙니다. 신분은 여전히 같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종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옮겨졌습니다. 흑암의 권세에게 구원받아서 그의 아들의 나라 통치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으로 주인을 섬기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안에서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기쁨으로 순종하며 삽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종이 된 것입니다.

2) 열매가 바뀌었다(20~23절)

원리에 대한 첫 번째 적용, 우리는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적용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열매가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이번에도 이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를 비교합니다. 전에 우리는 어떤 열매였습니까?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전에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에 대해서 자유로웠습니다. 의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고 따를 이유도 없었고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으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삶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유보다는 방종이나 방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면서 행하는 것들, 누리는 것들은 자유가 아닙니다. 죄에 매여서 죄의 지배 아래에서 부끄러운 결과를 얻을 뿐입니다.

바울이 질문합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죄의 종으로 살 때 어떤 열매를 얻었습니까?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죄의 열매들이 아닙니까! 그런 열매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전에 우리가 맺었던 열매가 그러했습니다.

내가 했던 경험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죄를 통해 나의 필요를 채우려고 했을 때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 결과가 좋았습니까? 아닙니다. 순간의 만족이나 쾌락을 얻기 위해 더 큰 것을 더 귀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대신에 죄책과 낙심과 좌절을 얻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죄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 때 얻었던 열매가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이 약물을 통해 행복감을 얻으려고 했을 때 즉각적으로 잠깐의 시간 동안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족은 순간이고 그 나쁜 결과는 오래갑니다. 그것이 지속되면 약에 대한 내성으로 만족감은 줄어들고 반대로 만족감을 느끼려는 욕구는 더욱더 커집니다. 결국 그 약물에 중독되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사람에게 같은 작용을 합니다.

죄는 잘못된 방법으로 나의 필요들을 채우려고 하고 그 결과 죄는 쉽게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옭아맵니다. 지배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비참한 결과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데 죄에 빠지면 그것을 보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부족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살인과 간음을 하는 다윗을 보면 왜 저런 어리석은 일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지만 유혹에 넘어가서 죄에 빠지면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도 그렇게 눈이 먼 상태로 살았던 자입니다. 죄의 열매를 맺으며 부끄러운 일을 하며 살았던 자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는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되어 얻는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바울이 자주 쓰는 중요한 전환의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때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그 결과를 비교하면 이러합니다. 그때는 의로부터 자유로운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때는 부끄러움을 가져오는 열매를 맺었지만 이제는 거룩함을 가져오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때는 죄의 열매로 그 마지막이 사망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열매로 그 마지막이 영생입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가 달라졌습니다. 그냥 조금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이미 경험하고 있고 또 그날에 최종적인 결과를 온전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는다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망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사망이 아니라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선물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은혜로 받는 영생의 선물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격 없는 우리가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명령(1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마지막으로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종의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했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고 우리의 열매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의 명령 거룩함에 이르라입니다.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바울은 명령을 말하기에 앞서서 자신은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를 전하기 위해 사람의 예대로 다시 말해, 종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아마도 종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을 배려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종은 그리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는 명령을 합니다. 우리 성경으로 보면 거룩함에 이르라가 명령인데 좀 더 분명하게 하면, 거룩함에 이르라 앞에 있는 내주어가 명령입니다. 내주라는 명령입니다. 이 단어는 13절 끝에 있는 드리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전체 문맥 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도록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

19절의 명령은 13절에서 했던 명령과 같은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지난 본문의 복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나 자신을, 나의 지식과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나의 모든 삶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리라

그러면 우리가 이 명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순종하면 될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우리가 죄의 종으로 있을 때 나의 욕심과 만족을 위해 수고했던 것만큼, 내가 죄의 열매를 얻기 위해 했었던 그 열정만큼, 내가 어떻게든 얻으려고 악을 쓰고 분노하며 내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만큼, 이제는 새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그러한 열정으로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나의 주인 되었던 자아, 물질, 욕망, 쾌락, 명예와 같은 그런 우상을 섬길 때 수고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하찮은 것들, 의미 없는 것들, 수준 낮은 것들을 위해 열심을 내고 수고하며 헌신했다면 하나님께 나를 드리며 거룩함에 이르는 이 귀한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열정과 헌신으로 수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따라야 할 명령은 분명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았던 지난날의 습관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날마다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종이었을 때 가졌던 충동과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죄를 이기는 효과적인 방법은 보다 가치 있는 좋은 것에 나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스마트 폰을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고 스마트 폰이 나에게 유혹이 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스마트 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단순히 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 스마트 폰을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좋아하는 영화를 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특별히 시간을 내서 극장에 갔는데 그래서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는데 그 자리에서 스마트 폰을 보고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러합니다. 죄의 종으로 있을 때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일에 마음을 두고 그 일에 시간을 투자하시고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보다 가치 있는 일에 나의 마음을 쓰고 나의 힘과 시간을 쓴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죄의 종이었던 옛 습관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는 항상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가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음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죄가 주는 결과를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사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니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