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가운데 계신 주께서 하시는 일 Part 1

본문 :  시편 68편 1~18절

설교자 : 최종혁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어린 아이들 같으면 하늘에 계시다고 답할 것이고 교회 좀 다니실 분들은 여기 계시다고 할 것이고, 조금 더 정확하게 대답하고 싶은 사람은 어디든 계시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신 분이시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서 무엇을 하시느냐일 것이다.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곳에 사랑의 아버지가 아닌 심판주로서 계시기 때문이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정확히 그 반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나와 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느냐 일것이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읽고 있는 역대기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후 마침내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고 언약궤가 지성소에 안착되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을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면서 신의 가호를 바랬던 당시의 많은 이방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그 하나님은 그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고, 대신 자신을 여러 방법으로 드러내셨다. 그 중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셨던 언약궤, 그리고 그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를 생각해 보면, 그 중요성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굳이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쉴 곳이 필요했던 것도 아닌데, 광야에서 재료들을 모아서 성막을 만들고 이동할 때마다 철거와 설치를 반복하는 것은 꽤 힘들고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하라고 명하셨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쁘게 순종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멈춰서 진을 쳤을 때, 그리고 그들이 다른 장소로 이동해 갈 때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이 멈춰서 진을 치면 성막이 중앙에 위치했고 그 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낮에는 나타났고 밤에는 불 같은 것이 나타났다(민 9:15).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임재를 나타내셨고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동할 때는 언약궤가 가장 앞서고 성막의 구조물과 성물들이 뒤따르는 지파들 사이에 위치했다. 즉, 성막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인도하심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물론 성막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못하고 인도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시는 장소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셨고, 성막은 그것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경험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기며 기뻐서 춤추며 축제를 벌였던 이유도 다른데 있지 않다.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기에 옳은대로 행했다. 중간중간 일어났던 사사들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했고 하나님 중심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하나되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맞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을 때,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었다. 그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재를 나타내시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은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다윗은 그것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다윗은 그 모든 여정의 절정으로 성전을 건축하여 언약궤를 임시 처소가 아닌 항구적인 처소에 두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그 일을 맡기셨고 솔로몬은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시편 68편은 역사적인 배경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바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올 때이다. 1절 말씀은 모세가 언약궤가 출발할 때 했던 말과 굉장히 유사하다.

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그리고 16절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시는 산에 대해서 언급한다. 또한 결정적으로 24-25절은 하나님께서 성소로 행차하시는 모습과 그로인해 기쁨의 축제가 벌어지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무엘하 6장과 역대상 15장에 기록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할 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35절에서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의 삶과 예배의 중심에 놓으면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특별히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가기까지 그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되돌아 보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68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핵심 내용은 7-31절에 있고 앞뒤로 서론과 결론이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6절 :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기초하여 말한다.

7-18절 : 그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한다.

19-31절 :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하시는 일을 말한다.

32-35절 : 그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것을 통해 다윗이 그의 시대에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나누기를 원한다.

서론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1-6절)

먼저 1-6절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말한다.

시 68:1-3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2-3절은 기도 형식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아마 일반적인 사실을 진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즉, ‘-합니다’, ‘-할 것입니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 1절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세가 언약궤가 움직일 때 했던 말을 인용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 발생하는 일을 묘사하는데,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1, 2, 3절에 한번씩 언급된 같은 의미의 표현이 있는데 바로 “주 앞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서”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악인들은 주 앞에서 멸망하고, 의인들은 주 앞에서 기뻐 즐거워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원수이다(1절). 그들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는 것처럼 사라지고 밀랍이 불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2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바로 심판인 것이다.

하지만 의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5-6절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시 68:5-6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처소는 성전보다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로서의 하늘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늘에만 계셔서 우리에게는 관심 없는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 또 광야의 긴 여정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4절에서는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럼, 그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까?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 주신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하고 빈곤한 자들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시는 것이다. 6절에는 고독한 자가 나오는데, 감정적으로 외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가 없이 홀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혼자서도 충분히 경제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가족 단위의 경제 생활을 했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신다. 그리고 갇힌 자들도 언급된다. 이 사람들은 자기 죄 때문에 이렇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경제적 상황, 정치적인 목적이나 전쟁 때문에 억울하게 갇힌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풀어주신다는 말이다.

즉,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신다. 그리고 오직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부한 자는 전혀 신경쓰지 않으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예를 통해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억울한 자들, 압제 당하는 자들, 연약한 자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봐도 그런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왕들은 힘 있는 자들, 부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지만, 진정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래서 4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 하나님을 미워하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 68: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하나님을 맞이하고 찬양하며 그 임재 앞에서 기뻐 뛰놀라는 것이 다윗의 말이고, 실제로 언약궤를 그들의 삶의 중심지로 가져오면서 다윗은 그렇게 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로서 합당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했다.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 가운데 계시면서 하셨던 일을 주목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들 가운데 계셨는지, 그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과거 :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7-18절)

68편에는 셀라가 3번 나온다(7, 19, 32절). 주로 셀라는 단락을 끝내면서 내용을 다시 묵상해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로 단락을 시작하면서 그 단락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시 68: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다윗은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셨던 일부터 회고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길을 갈 때 그들은 지도를 보고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 기둥의 안내를 따라 언약궤가 가장 먼저 움직였고 그 뒤를 따라 온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질서 있게 행진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명백했다.

시 68: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여기서도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반복된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었음이 땅이 흔들리는 등의 자연 현상을 통해서 나타났다. 특히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해서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고 그 음성을 직접 듣는 것도 거부할 정도였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랜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하신 분은 바로 그들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셨다.

시 68:9-10 9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이 말씀이 실제로 어떤 일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그 땅에 충분한 비를 주셔서 그들로 그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은혜를 베푸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농경 사회에서 흡족한 비는 풍요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도착한 후에도 하나님의 변함 없는 돌보심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 그 땅에 살고 있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셨다.

시 68:11-12 11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12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환영하는 모습을 말한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여자들이 나와서 환영하며 다윗의 공을 높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을 때 그런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좋은 예가 바로 가나안 정복이었다. 가나안 정복은 착하게 잘 살고 있던 민족을 약탈하고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죄가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신 사건으로 봐야 한다. 13-14절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의 결과를 묘사한다.

시 68:13-14 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 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13절의 묘사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평화롭게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땅에 살던 왕들은 눈이 날리는 것처럼 흩어졌다.

여기까지 다윗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시면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음을 묘사했다. 1-6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충분히 증명된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15-18절에서는 그 하나님이 지금은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심을 말한다.

시 68:15-16 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바산의 산들은 북쪽에 있는 산으로 높은 산들이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산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임재를 나타내시는 산은 그런 산들이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크신 하나님께 어울리는 산은 그런 높은 산들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산은 바로 ‘이 산’, 작은 언덕 같은 시온 산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더 좋은 곳에 거하실 수도 있었지만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더 높고 큰 산이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 계심을 나타낼 수 있는 곳에 거하기를 선택하셨다. 그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산이다.

다윗은 그 산들을 사람처럼 표현해서, 바산의 높은 산들이 시온 산을 시기한다고 묘사한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신 것이 특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토속 신앙을 보면 크고 높은 산에는 무슨 특별한 ‘기운’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에도 사람들은 새해가 되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그런 곳에 가서 무슨 ‘기운’을 받아온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크고 높은 산이 아닌 작은 산에 거하시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시 68: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작은 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두시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시내 산 성소에 계셨던 하나님, 그들이 두려워했던 하나님은 이곳에서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대군을 거느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그 장소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궁극적인 승리자로 묘사한다. 높은 곳에 오르시고 포로와 전리품을 취하며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이다. 그 승리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는 언약궤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작해서 지금 그들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고 그들을 위해 일하셨음을 다윗은 분명히 하고, 19절부터는 이제 그들의 현재로 온다. 그 말씀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

도전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고는 쉽게 말하지만 내가 진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이 어디에든 계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도 현실감 있게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는 성전과 언약궤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언약궤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사무엘상 4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사건이 다윗이 언약궤를 오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게된 단초가 된 사건이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렇게 말했다.

삼상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 말을 한 장로들도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그들 중에 계시며 함께 하셨는지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들 가운데 두면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왔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삼상 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에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애굽 사람들을 쳤을 뿐 아니라 가나안의 많은 민족들도 하나님이 치신 것을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웠지만 서로 격려하며 더욱 힘껏 싸웠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삼상 4:10-11 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정말 치욕스러운 사건이 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하나님은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뭐가 문제였을까? 그들에게 언약궤가 있었는데, 왜 패배했을까? 언약궤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일 뿐 하나님의 임재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 언약궤에 종속되어 있는 분처럼 언약궤만 가져오면 하나님이 따라오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할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다.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는 분으로서, 구원하는 분으로서 계시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언약궤를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지 않으셨을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아 그 계명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와 같이 표현한다면,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져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이 사건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모욕감이 드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더 느끼기 위해 언약궤가 필요하지 않다. 성경을 더 좋은 것을 사면 하나님의 임재를 더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에 나오면 더 하나님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신다. 그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성령님의 통제를 거부하면서, 다른 어떤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임재를 느끼고자 하는 것은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할거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다윗이 과거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을 묵상하고 즐겁게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가장 선명하게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참된 기쁨과 예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더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 바산의 높은 산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온 산을 보며 부러워했던 것처럼,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고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