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율법주의보다는 불순종이 낫다?

본문: 마태복음 23장 23절

설교자: 조정의

‘율법주의’는 교회에서 부정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확한 이해 없이는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킨다. 

가령 수요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율법주의인가? 참석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하나님 앞에 호의를 얻으려고 하거나, 참석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덜 얻을 것이라고 염려한다면 율법주의다. 그런 건 아닌데, 참석 못한 성도를 판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가? 판단까지는 아니고 함께 모이기를 힘썼으면 하는 마음, 성도가 믿는 도리의 소망에 굳게 서길 바라는 마음을 품는 건 괜찮지 않나? 이런 복잡한 생각을 품는 게 율법주의 때문이라면, 차라리 불순종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본문을 통해 1) 율법주의의 문제가 뭔지, 2) 정말 불순종이 더 나은 것인지, 3) 율법주의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상세히 살펴보자.

1. 율법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은 마태복음 23장 1-3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설교 내용 중 한 구절로, 마태복음 5장의 팔복 설교에 상응하는 칠화(七禍) 설교라고도 부른다. 설교의 대상은 “무리와 제자들”이다(마 23:1).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표적인 율법주의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피하라고 경고하셨다. 율법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① 입법자가 되려는 문제(2-4, 16-22)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셨다(2). 모세는 기록된 율법에 따라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법에 따라 재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지만, 모세와 큰 차이가 있었다. 모세는 법 위에 올라가 자기 멋대로 법을 해석하지 않았다. 백성과 똑같이 법을 준행하는 자였다(민 9:8).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법 위에 올라가 자기 멋대로 법을 해석하고 이를 백성에게 요구했다(약 4:11-12). 그들은 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입법자가 되려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다(3). 하나님의 법대로 가르치고 판단하는 역할은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깨에 지운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입법자의 태도를 비꼬아 엄히 책망하셨다(4). 

율법주의자의 문제가 이것이다. 입법자가 되려는 것. 자기도 완벽하게 순종하지 못하는 규칙과 규율을 만들고 이것을 절대적 기준처럼 강요하며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예로 집에 TV를 없애고 말씀 보는 시간을 늘리려는 행위 자체는 율법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적인 법처럼 여겨 다른 이에게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긴다. ‘당신도 VOD 서비스로 미디어를 즐기잖아요’라고 묻는 자에게 ‘VOD 서비스는 괜찮지만, TV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입법자가 되려는 것이다. 

16-22절을 보면 실제로 율법주의자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하고(16), 제단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제단 위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18). 자기들 마음대로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결국 성전과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고(21), 제단에 맹세하면 결국 제단 위 모든 것으로 맹세하는 것이라고 하셨다(20). 

우리는 모두 말씀을 해석하고 삶에 적용할 원칙, 규칙 등을 만들어 지킨다. 하지만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준행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세우고 그에 대한 순종을 자신과 남에게 강요하는 입법자가 되게 한다.

② 사람에게 보이려는 문제(5-12, 25-28)

예수님은 율법주의자의 또 다른 문제로 사람에게 보이려는 문제를 지적하셨다.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했다(5). 입는 것(넓은 경문 띠, 긴 옷술), 앉는 곳을(잔치 윗자리, 회당 높은 자리) 신경 쓰고(6), 문안받기와 선생(랍비) 소리 듣기를 좋아했다(7).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8-10절까지 예수님은 호칭 문제를 다루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생을 선생(랍비), 아버지를 아버지, 지도자를 지도자라 부를 수 있다. 예수님이 문제로 삼는 것은 율법주의자가 이런 소리 듣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형제들 사이에서 가르치려 드는 자가 되는 것,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유일하신 지도자 그리스도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이 문제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는 면이 아니라 내면을 깨끗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26). 그들은 마치 겉은 깨끗한 잔과 대접인데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자와 같고(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았다(27). 율법주의자는 겉으로만 사람에게 옳게 보이면 됐지, 그 안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심각한 문제는 간과했다(28).

율법주의자의 신앙은 철저히 사람 중심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가증한 일이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혈통, 배경, 나이, 성별, 지위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않으시며, 오직 중심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고 또 사람을 그 섬김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사람에게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율법주의는 그 모든 것을 순전히 사랑을 베풀기 위한 것이 아닌 사랑과 인정과 존경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변질시킨다.

③ 의에 이르지 못하는 문제(13-15, 29-36)

율법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책망하셨다(13).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교인을 찾아내 결국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꾸짖으셨다(15). 자기 뜻을 하나님 뜻보다 앞세우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자기중심적이고 사람 중심적인 삶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지옥 자식의 삶이다. 율법주의는 추종자를 반드시 멸망으로 인도한다.

2. 율법주의, 불순종이 나은가?

그러면 차라리 불순종이 나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마 7:21). 예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것이고(마 7:23), 천사들을 보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어 던져 넣으”실 것이다(마 13:41-42). 율법주의자, 불순종하는 자 모두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데 뭐가 더 나은지 따져볼 필요가 있는가? 없다.

3. 율법주의, 해답은 무엇인가?

이제 율법주의의 해결책을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자를 책망하신 문제의 역순으로 해답을 찾아보겠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의에 이르지 못하는 문제

우리는 율법주의를 통해 결코 의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롬 10:10). 무엇을 믿는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그분이 나의 죗값을 완전히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나의 영원하고 완전한 의가 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롬 10:9).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의로운 길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로운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조상들의 죄에 참여하여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29-36). 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미워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알고 믿는다. 예수님 외에 의로우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없다. 하나님께 내가 의인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근거는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99%가 아니라 100%). 그러면 왜 순종하는가?

순종은 은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얻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인정을 받은 자로서 하는 것이다. 빚진 자로서 하는 게 아니라 빚을 탕감받은 자로서 자발적으로 감사하며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로서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는 은혜를 강조할 때 혹 순종이 약해질까 염려하지만, 은혜는 율법보다 훨씬 강력한 순종의 동기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이것을 기억하라: 나는 이것을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히 의롭다고 인정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신앙의 대상이시다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문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신앙의 대상이시다. 이 말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안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6).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갖는 것이다(시 51:6, 딤전 3:9). 

여기 신비로운 역설이 있다.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럽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엔 그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자는 사람이 볼 수 없지만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백하여 죄 용서를 받고 회개하여 깨끗함을 입는다(요일 1:9). 예수님 말씀처럼 이렇게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한 자는 겉도 깨끗해진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

물론 우리는 사랑으로 수고한 이들을 알아줘야 한다(고전 16:18). 하지만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라.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그럴 때 쉽게 신앙의 대상이 바뀐다.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권면을 따르라(엡 5:10). 이 권면은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심사숙고하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 무엇을 하든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갖게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주님 앞에서 하고 주를 위해서 하라(고전 10:31).

율법의 준행자로서 입법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주의자처럼 율법의 입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준행자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의 모습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인양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순종을 통해 은혜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무한한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선한 동기와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 방식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방식일 경우,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라(예: 매주 예배 참석을 위해 직장이나 근무 형태로 변경, 믿지 않는 가족과 함께 한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

때로는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지 않으실 때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어 하는 당신의 진심이 다른 순종의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게 하라. 예수님은 중심에 해당하는 정의, 긍휼,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그것의 매우 구체적인 행함인 박하, 회향(미나리), 근채(목란)의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마 23:23). 

예를 들어 다니엘은 우상을 섬기는 제국의 통제 아래 율법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지만,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의 예배를 드렸다. 요셉은 처음엔 노예 나중엔 죄수로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지만,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의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당신의 진심이 표현될 수 있도록 가장 합당한 순종의 방식을 찾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고 순전한 마음으로 준행하라. 우리의 삶 전체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길 간절히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