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본문: 히브리서 13장 1-3절

설교자: 조정의

‘손님 대접’(hospitality)은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 백성과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그러면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9:19, 새 계명, ‘서로 사랑’).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강도 만난 나그네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사랑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요구하셨다(눅 10:29-37). ‘내가 사랑할 이웃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자비를 베푸는 이웃인가?’가 옳은 질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을 베푸셨다. 그러면 그분의 제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게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라고 명령한다(히 13:2). 또한 제자들을 가르칠 일꾼에게 ‘나그네 대접’이 요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딤전 3:2; 5:10; 딛 1:8). 손님 대접이 중요한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1. 손님 대접은 믿음의 열매다

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13장에 기록된 모든 권면은 앞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한다. 1-12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월하다’는 것은 단지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다는 의미다. 다른 모든 것은 불완전하여 우리를 만족시키는 일에 부족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하여 우리를 영원히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시다:

예수님은 모든 계시보다 우월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시다(가장 위대한 메신저, 메시지, 1-4장). 예수님은 모든 제사장보다 우월한 제사장이시다(4-7장). 예수님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주어진 약속, 화목, 친교보다 월등히 뛰어난(완벽한) 약속, 화목, 친교를 주시는 분이시다(8-10장). 

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것들로 인해 흔들린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한다.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기웃거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수님을 보충할 각종 우상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분 안에 약속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보게 하는 믿음이다.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봤다(11-12장). 히브리서 12장의 결론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은 흔들리지 않는 소망에 근거한다. 그래서 손님 대접은 믿음의 열매다. 예수님의 충족함을 믿음으로 보는 자는 손님 대접을 잊지 않는다. 반대로 예수님의 충족함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자는 손님 대접을 잊어버린다.

본문에서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 참 흥미롭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3절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명령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도 긍정적인 명령인 ‘힘쓰라’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정적인 명령, “잊지 말라”를 썼다. 그만큼 잊고 살기 쉬운 명령이기 때문이다. 당장에 먹고 사는 일에 빠져 염려하는 자는 손님 대접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자기 짐 지기에도 힘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면 부유하고 여유로운 사람만 가능한가?

아니다. 믿음이 필요하다. 오직 주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할 줄 아시고 그 필요에 따라 주실 것을 믿는 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그 소망을 근거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손님 대접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단지 낯을 많이 가리거나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부족한 믿음을 드러낸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이 주실 충분한 보상을 믿어야 한다(히 11:6).

그리스도의 제자 중 본문의 명령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이 있을까?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의 대상은 ‘너희’다(2인칭 복수). 시간과 물질에 여유가 있는 사람만? 외향적이고 붙임성 있는 사람만? 손님 대접할 공간이 있는 집에 사는 사람만? 결혼한 사람만? 교회 새로 더해진 사람은 빼고, 오래 다녔던 사람만? 교회 직분이 있는 사람만? 교회 생활을 신실하게 잘하는 사람만? 젊은 사람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둔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명령이다.

손님을 대접할 때 당신은 시간과 물질과 공간과 생각, 감정과 개인의 편안함 등을 포기하고 내어주는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 믿음을 두고 사랑을 실천하면, 가장 뛰어나신 주님이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주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하신다. 나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하게 하신다.

열왕기상 17장엔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지독한 가뭄의 시기가 나온다. 그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사르밧에 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대접받게 하셨다. 누구에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을 마지막 양식으로 가지고 있었던 아들 딸린 과부에게. 과부는 마지막 식사 후 굶어 죽으려고 했다. 여인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엘리야를 대접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다시 비를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믿고 순종할 때, 소망의 하나님을 경험한다.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쁨과 견줄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당신이 믿고 소망하는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하고 싶은가? 믿음의 열매인 손님 대접을 잊지 말라.

2. 손님 대접은 사랑의 열매다

손님 대접이 사랑의 열매라는 사실은 본문에서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다. 13장의 권면은 형제 사랑부터 시작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1절). ‘형제 사랑’을 뜻하는 필라델피아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본성이다. 베드로는 거듭난 우리가 타고난 본성을 가리켜 “형제를 사랑하기에(필라델피아) 이르렀”다고 말했다(벧전 1:22).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을 때, 우리는 함께 그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를 향한 ‘형제애’를 가졌다.

또한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새 계명”이다. 참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를 힘입어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셨다(요 13:34).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사랑할 대상은 단지 믿음의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했다(갈 6:10). 우리는 형제자매를 시작으로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취지의 명령을 순서대로 기록했다. 먼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그리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그래서 손님 대접은 사랑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손님 대접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다. 숙제하듯 하긴 해야 하니까 의무적으로 하는 일도 아니다. 귀찮아하거나 인색하게 해서도 안 된다. 손님 대접은 사랑의 열매 곧 사랑으로 하는 일이다. 나를 위해서가(이기적)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이타적) 하는 일이다. 상대방의 필요를 돌아보고 그 처지와 상황을 헤아리며 동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3절을 보라.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기억)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의 독자 중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충성스러운 삶을 산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거나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적 학대를 받는 자들이 있었다(히 10:32-34). 그래서 그들은 같은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헤아리고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다.

32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2-34)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하시고(가르침)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시고(마 14:13) 또 만찬을 베풀어 떡과 물고기로 그들을 대접하셨다(막 6:41-44).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막 6:34). 히브리서 기자도 앞서 예수님의 “동정”을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그분의 긍휼하심을 대접받을 수 있다. 때를 따라 우리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그분의 보좌 앞에 언제든 초대받을 수 있다(히 4:15-16).

그리스도인의 손님 대접과 세상의 손님 대접은 뭐가 다를까?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자주 대접하며 행복한 교제권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다(해외 봉사활동). 겉으로 보이는 것엔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 월등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경험할 수 없는 사랑, 세상이 약속할 수 없는 소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손님에게 소개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마태가 그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나온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대접했던 것처럼(마 9:10).

바리새인들은 이런 손님 대접을 못마땅히 여겼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따져 물었다(마 9:11). 예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뭐라고 답하셨는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주님은 죄로 병든 이들을 동정하셨다.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셨다. 죄인을 불러 회개하고 영원한 회복을 선물하기 원하셨다. 우리에게 바리새인이 아닌 예수님의 시선, 사랑의 시선이 필요하다. 당신 눈에 주님의 긍휼과 회복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월등한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그리고 우리는 손님 대접을 통해 그리스도의 월등한 사랑을 이웃에게 전한다. 베드로는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한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벧전 3:8). 

그러므로 손님 대접을 잊고 사는 삶, 소홀히 취급하는 삶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우월하신 사랑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불신), 둘째, 그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기심)이다. 당신의 집에 있는 수저와 젓가락이 몇 세트인지 세어보라. 의자는 몇 개인가? 딱 가족 숫자만큼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손님 대접을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하는가? 

읽은 책에서 한 성도가 특별한 사정이 있어 교회를 떠나게 됐을 때, ‘이 성도가정의 초대를 한 번이라도 받은 적이 있는 성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는 목사님의 요청에 거의 대부분의 성도가 일어났다는 간증을 본 적이 있다. 참으로 멋진 삶이다. 반대로 한 사람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떨까? 참으로 부끄러울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가 손님 대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이미 아신다. 주님의 우월한 사랑을 받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주님 앞에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3. 손님 대접은 당신의 열매다 

2절 후반에 나오는 이 구절을 잠시 생각해 보자: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성경 인물들이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창 18장), 롯과 그의 아내(창 19장), 마노아와 그의 아내(삿 13장). 그들 모두 온전하지 않았지만, 믿음의 가정이었다. 그들 모두 각자 짊어진 짐이 있었다(땅, 자손, 악한 백성 가운데 살아가는 싸움). 하지만 그들은 연약하지만 진실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않았다. 밝히 알지 못했지만, 이로써 천사들을 대접했다.

히브리서에서 천사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로 예수님이 얼마나 우월하신지 비교할 때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이라고 말했다(히 1:4). 그래서 천사들을 대접했다는 말은 우리가 대접한 손님이 뛰어난 존재인 천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잘하면 천사를 대접할지도 모르니까 손님 대접을 잘하자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예수님과 나누게 될 이 대화를 예행 연습해보자(마 25:31-46). 우리는 영생에 들어갈 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보시고, 하지 않은 것을 주님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은 곧 천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손님 대접은 하면 좋고 안 하면 그만인 명령이 아니다. 주님으로 충분하다는 걸 믿고 그분이 기뻐하며 상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는 믿음의 열매다. 주님의 풍성한 자비와 동정과 사랑을 받은 자로서 똑같은 긍휼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 사랑을 전달하는 사랑의 열매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당신의 열매다.